“제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는 많은 장애물을 넘어야 했어요. 연극무대에 서는 것이 꿈이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연극무대와는 거리가 먼 회계학을 전공했어요. 연기공부가 하고 싶어 자금마련을 위해 모델 제의를 받아들이기도 했죠. 그러다가 어느 날 결단을 내려 러시아로 유학을 떠났어요. 이어 미국에서 연기공부를 하던 중 IMF를 만나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가까스로 학업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어요. 막 활동을 전개하던 차에 이번에는 암 선고라는 시련이 길을 막더군요.”

 

박리디아 씨(52)는 공연예술업계에서 실력 있는 연출가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다. 러시아, 미국 등 해외에서 무대연출 학위를 취득한 그는 국내에서 진행된 다수의 오페라, 연극, 뮤지컬 등의 연출을 맡아 완성도 높은 무대를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공연업계가 주목하고 있는 실력파 연출가이지만 그의 직업은 연출가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초 배우, CF모델로 활동했던 그는 연출 활동 이외에도 배우, 모델로 직접 무대에 위에 서기도 하고 학생들에게 연기예술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하다. 그는 대한민국 ‘1세대 만능 엔터테이너’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연출가, 교육자로써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박 씨는 사실 1990년대에 광고시장을 주름 잡던 배우이자 모델이었다. 그는 16세에 연극 무대를 데뷔한 뒤 삼성, LG, 대우, 대한항공 등 각종 광고 CF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 달에 한 번, 여자는 마술에 걸린다’는 유명 광고 카피도 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해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학창 시절부터 무대에 대한 동경이 가득했어요. 16살이 되던 해에 교내 연극반에 들어간 것이 제 꿈을 향한 첫 발을 내딛은 것이었죠. 연극반에서 제1회 청소년연극제에 참석하게 되고 그것이 저의 첫 데뷔 무대가 됐어요. 무대에 직접 서고 난 다음에는 더욱 연기를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연극영화과에 갈 수 없었어요. 결국 회계학과에 입학하게 됐어요.”

 

큰 키와 작은 얼굴을 소유한 그는 대학교 입학 후 모델 에이전시로부터 잦은 길거리 캐스팅을 받게 됐다. 하지만 모델보다는 무대에 대한 꿈이 가득했던 그는 번번이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제가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까지만 해도 길거리 캐스팅이 빈번히 있었어요. 키가 큰 편이고, 얼굴이 작아 유독 모델 에이전시로부터 스카우트를 많이 받았죠. 하지만 그 당시에는 오로지 연기만을 생각했던지라 거절했어요. 그땐 지금의 엔터테인먼트의 개념이 없어서 모델을 하는 순간 연기를 포기해야 하는 걸로 알았거든요.”

  

모델은 극구 거절하던 그였지만 대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는 모델로 데뷔를 하게 됐다. 연극을 하기 위해서 자금이 필요했던 그는 ‘모델’ 활동을 통해 연극 무대로 가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연기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어요. 하지만 부모님은 좀처럼 허락해주지 않았죠. 고뇌가 조금씩 커져가던 중, 과거 저를 캐스팅했던 모델 에이전시 ‘모델라인’사장님을 만나게 됐어요. 또 같이 일을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저는 ‘모델 일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냐’고 대뜸 질문했죠. 그는 ‘그렇다’고 말했고 모델 활동을 하게 됐어요. 연기를 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였죠”

 

비주얼에 이어 연기 베이스까지 탄탄했던 그는 모델라인과 계약 이후 각종 광고를 섭렵했다. 광고 모델 이외에도 KBS ‘독점여성’ 등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서 메인 MC를 맡기도 했다. 연예계에서 차세대 스타로 주목받으며 승승장구하던 그였지만 돌연 러시아행 비행기를 끊었다.

 

“모델로서의 활동이 길어지다 보니 정통연기 공부를 할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어요. 더 늦기 전에 연기 공부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이후 러시아 국립극장예술대학교에 진학해 음악 연출을 공부를 마쳤죠. 졸업 후에도 배움에 대한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어요. 미국에서 조금 더 공부를 싶었어요. 연기예술은 러시아와 미국이 양대 산맥이라고 할 정도로 앞서 있거든요. 결국 뉴욕 브로드웨이로 향했죠.”

 

 

미국의 저명한 연출가이자 배우인 ‘우타하겐(Uta Hagen)’의 시스템이 갖춰진 HB스튜디오 입학하게 된 박 씨는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됐다. 1997년 IMF 경제위기가 찾아오면서 환율이 급락한 것이다. 당시 원화를 달러로 환전해놓지 않았던지라 당장 생계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그는 집세와 식사비를 해결하기 위해 공부와 일까지 병행해야 했다. 식료품점 종업원, 길거리 버스킹, 현지 리포터 등 수많은 일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그렇게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4년 6개월 동안의 공부를 마쳤다. 이제 준비가 됐다고 생각한 그는 귀국을 결심했다. 귀국 이후 곧장 연출가, 배우로써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몸에 이상 징후가 생겨난 것이다.

  

“귀국 이후 뮤지컬 ‘루나틱’에서 주인공으로 발탁되고 성균관대학교 연기예술학과에서 강의 요청까지 왔어요. 그렇게 차츰 자리를 잡아가던 중,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어요. 어느 날 갑자기 얼굴에 트러블이 심각하게 나타나는 것이에요.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사를 권유하더군요. ‘자궁암’ 진단을 받았어요.”

 

약 8년 동안 배우, 연출 공부를 해오며 꿈을 펼칠 준비를 해왔지만 암 진단을 받으면서 모든 것이 멈춰 섰다. 치료에 돌입하며 비관적인 생각도 했지만, 박 씨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갖기로 했다. 그는 암 치료 중에도 말기 암 환자가 있는 병원을 찾아 봉사활동을 자처했다.

 

자신보다 더 어려움에 직면한 이들을 도우면서 스스로 치유하고 남들도 치유하겠다는 목적에서였다. 봉사활동과 식이요법을 병행한 끝에 그는 자궁암을 완치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암 치료를 진행한 그는 몸을 쓰는 연기 등에 제약이 생겼다. 이때부터 그는 연출가의 길을 걷기로 다짐했다. 이후 그는 미국 HB스튜디오에서 수학한 연기 커리큘럼 ‘우타하겐’ 시스템을 자신만의 색깔로 녹여 ‘박리디아 시스템’을 재창조했다.

 

이를 기반으로 한 끝에 그가 맡은 연출은 대중으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국내와 중국을 통해 연기코치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특히 베트남 등 해외 지역에서 유명세를 떨쳤다. 지난 2016년에는 베트남 다낭에서 열린 ‘The Autumn Meeting 2016(An Annual International Cinema Event In Da Nang, Viet Nam)’에 정식 초청 된 박 씨는 단독 연기워크숍을 개최했다.

 

그런데 박 씨의 강의가 베트남 국영방송인 VTV 채널1과 채널3에 연이어 소개되면서 베트남 국민에게 큰 관심을 받게 됐다. 박 씨는 이를 계기로 자신의 연기 커리큘럼 ‘박리디아 시스템’과 한류를 전 세계에 전파하는 연출가 겸 연기 교육자로 활동하는 게 그의 최종적인 꿈이 됐다고 말한다.

 

“최근 방탄소년단의 인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한류열풍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대중문화와 예술이 그만큼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죠. 그동안 우리나라가 미국, 러시아 등에 연기학을 수입해왔다면 이제는 우리 것을 전파하는 뜻 깊은 일을 하고 있어요. 베트남에서 ‘박리디아 시스템’에 대해 뜨거운 관심을 줬던 것처럼 저는 우리 연기교육 시스템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우수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이제는 우리 것을 자신 있게 알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