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깃발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스카이데일리 칼럼

박선옥 기자(sobahk@skyedaily.com)

기사입력 2020-05-22 00:02:35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영문학 전공자가 아니라도 한 두 번 쯤 들어봤음직한 희곡 제목이다. 연극으로 접하지 않았다면 영화제목으로라도 귀에 익은 작품이다. 전차, 지금으로 치면 지하철에 해당하는 당시 주요 도시 교통수단인 ‘전차’에 ‘욕망’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서 어렴풋이나마 작품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오래 전에 봤던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갑자기 뇌리에 스친 것은 최근 의혹이 줄줄이 불거져 나온 정의기억연대(정의연) 때문인 듯하다. ‘정의라는 이름’을 앞세워 활동해온 정의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다가 연상작용으로 이 연극 제목이 떠올랐던 것이다. 물론 정의연이 ‘정의기억연대’라는 간판을 달게 된 것은 만 2년이 채 안되지만 그 전신이 다른 이름으로 출발한지는 올해로 30년이 된다.

미국을 대표하는 극작가 중 한 사람인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1947년 초연됐고 이듬해인 1948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1951년에는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오늘날의 관객 시선으로 봐도 전혀 감각적으로나 시사적으로나 뒤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충격으로 다가올 만한 작품이다.

작품은 미국 남부 상류사회의 일원이었던 한 여성이 남부의 쇠퇴와 함께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블랑쉬’라는 이름의 여주인공은 남부 명문가의 장녀로 젊은 시절에는 아름다웠지만 나이를 먹으며 불행한 삶을 겪어가는 와중에 파멸로 치닫는다는 내용이다.

그녀가 기차 역무원에게 묻는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야해요. 그 다음엔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고 여섯 정거장을 가면 엘리시안 필즈라고 하던데요.” 엘리시안 필즈는 그녀의 여동생이 살고 있는 곳이지만 엘리시움(Elysium)은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들이 사는 천국을 뜻하는 말이다. 작가는 욕망이 죽음으로 이끌고 그 죽음 뒤의 안락한 천국을 블랑쉬가 가려는 것이라고 암시하는 듯하다.

생각해보니 정의연이 이 작품을 떠올리게 한 것은 제목 이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 대목 때문이다. “난 사실을 원치 않아요. 난 마술을 원하죠. 네, 그래요, 마술. 난 사람들에게 마술을 걸고 사실을 말하지 않죠. 그리고 뭐가 진실이어야 하는지를 말하는 거죠. 그게 죄라면 벌을 받겠어요.”

정의연은 위안부라는 우리 국민의 가슴에 맺힌 한(恨)의 정서에 호소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았다. 만일, 지금까지 제기된 의혹들이 사실이라면 이는 위안부와 반일정서라는 마술로 국민을 현혹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정의연을 둘러싼 의혹은 바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으로 촉발됐다는 점에서 국민들에게 충격을 줬다. 정의연 회계처리와 사업 진행 방식 전반에 대한 의혹이 눈덩이처럼 커졌고 이는 이 단체를 30년간 이끌어온 윤미향 더불어시민당 당선인(비례대표)의 개인 비리 의혹으로까지 번지는 상황이다.

많은 시민단체들이 정의연과 윤 당선인에 대한 고발에 나섰다. 사법시험준비생모임은 윤 당선인과 정의연 및 정대협의 전·현직 이사진 등을 업무상 배임, 기부금품의 모집 및 사용에 관한 법률(기부금품법) 위반 등 혐의로 고발했다.

정의연과 윤 당선인에 대한 고발 내용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전문가들은 이들에 대해 적용 가능한 혐의가 크게 두 가지라고 말한다. 하나는 기부금·후원금 사용과 회계부정 논란을 둘러싼 횡령 혐의이고, 다른 하나는 경기도 안성 쉼터 고가 매입 논란에 따른 업무상 배임 혐의다. 한 변호사는 “기부금을 용도 외로 사용한 것이 확인된다면 업무상 횡령이 될 수도 있고 기부자에 대한 사기 혐의가 적용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의연 뿐 아니라 다른 단체에 대해서도 기부금에 관련해 또 다른 잡음이 나오고 있다. 방송인 유재석이 2014년부터 2018년까지 5년간 ‘나눔의 집’에 모두 2억6000만원을 후원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후원금 사용처에 관한 논란이 확대된 것이다. 이와 함께 정의연 등 시민단체들의 불투명한 기부금 사용처와 관련해 논란이 이어지고 모금문화에 대한 불신으로 확산되면서 자신이 수년간 지속했던 단체의 후원활동을 중단하겠다는 후원자들도 나오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정의연 같은 단체가 특히 ‘정의’라는 절대적 가치의 이름 아래 활동했기 때문에 후원자들은 아마도 매사에 모든 것이 정의롭게 이루어지고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후원자들이 사실을 일일이 확인할 수도 없으나 그보다는 그들이 선언적으로 내세우는 ‘정의’라는 기치가 뿜은 아우라에 매혹된 것이다. 이제 정의라는 이름의 깃발이 가졌던 힘이 마술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누군가는 욕망에서 묘지로 가는 전차로 갈아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