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투쟁이 격렬했던 격동의 1980년대 당시 학생운동의 선봉에 섰던 한때의 용공분자(容共分子)가 대한민국 통일부 장관실 문을 당당히 들어가는 격세지감의 시간을 열었다. 이인영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 보고서가 사상적인 논란과 자녀 병역비리 의혹 속에서도 여당 단독으로 강행 채택돼 사실상 예정된 수순의 장관 임명을 위한 요식적인 절차가 끝났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란 금과옥조를 떠받들며 미국을 반통일 세력으로 규정한 반제국주의 통일운동의 선두에 섰던 통일부의 새 컨트롤타워가 앞으로 어떤 운전을 할지는 예견되고도 남는다. 과거처럼 미제(미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지는 않겠지만 소위 ‘우리민족끼리’를 근간으로 한 반외세 자주통일 깃발을 나부낄 의지는 지금까지의 언행들을 보면 충분히 예상된다.

 

인사청문회에서 그는 주체사상 신봉자가 과거도 아니고 지금도 아니라고 했지만 중간중간 말꼬리를 흐리는 말투를 많이 남겼다. 공산주의 이념을 따르는 용공의 낙인이 군사정권 시절이었기는 하지만 386 운동권이 ‘반미·반독재’를 뜻하는 ‘반제·반파쇼’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 팩트였다는 사실을 끄집어 내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이런 전력을 감안하면 통일부의 향후 행보가 두렵기까지 하다.

 

전대협을 만들어 제1기 의장을 맡은 이력이 오늘의 최연소 4선의원이라는 화려한 이력을 선사했다. 30여년의 세월이 흘러도 전대협의 통일 정신과 그 지배적 사상이 통일부 수장과 한 몸이 될 것을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전대협이 통일의 정의로 내세운 방식 중 가장 중요한 요체가 외세배척이었기 때문이다. 언뜻 환상적인 통일방식인 듯 보이지만 북한의 통일방식과 연장선상에 있으니 섬뜩하다. 미국 패권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가면 가능한 통일의 방식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 일이다.

 

남북통일에 직간접 영향을 미치는 대한민국 주변 4강국의 존재는 냉엄한 현실이다. 이 모두를 배척하고 통일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상적인 그림이 맞다. 하지만 전혀 가능하지 않은 설계는 몽상이다. 아니면 권력을 위한 가짜설계로 대중을 현혹하는 정치적 미혹의 수단일 뿐이다.

 

한반도 평화운전자론은 반외세 자주통일의 변형된 설계다. 전대협 제3기 의장을 맡았던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상왕식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가 줄곧 넘실댔다. 그 기조가 크게 바뀌지 않은 가운데 평화운전의 숱한 실패와 조롱 속에서도 결국 이인영 카드가 또 뽑혔다. 대타가 돼서는 안 될 대타를 해결사로 전면에 세운 것은 또 다른 위험한 평화운전의 시동이다.

 

북한이 적대적 관계를 선언한 이상 우리는 그에 준한 강경 인물을 전면에 세우는 것이 상식이다. 굽신거리는 평화운전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얘기다. 전대협 출신 인사의 통일부 수장은 북한 입장에서 보면 속칭 ‘그 나물이 그 나물’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북한은 여전히 우리를 무시하고 이용하려는 셈법에 더 빠진다. 그런 속내를 감추지 않아 온 북한이다. 앞으로도 대한민국을 생존의 지렛대로 이용할 것임을 대리자란 형식의 이름으로 직간접 표출해 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핵 지렛대를 완성해 가는 북한식 전술을 도와주는 조연 역할을 계속 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북한의 군사도발 위협이 역대급이라고 할 만큼 단기간에 가장 많이 이어진 끝에 적대적 전선이란 원점회귀는 핵전략 시즌2의 시작이다. 제1막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김정은 핵정권 생존기는 유감없이 피날레를 날렸다. 제2막에서 이어질 생존기는 위협이 아닌 패권이란 방점이기에 공포스러운 일이다.

 

북한의 핵 패권이 완성되면 남북분단은 완전히 고착화 되고 만다. 평화운전 이상론은 그야말로 ‘닭 쫓던~’ 신세가 될 상황이다. 전대협 식 통일전선은 휴전선을 영구히 분단선으로 만드는 우를 범할 환경으로 제공된다는 것이다. 5000만 국민의 치명적인 핵 안보위협은 물론 우리 군의 존재를 무력화 시키는 한편 북한 정권의 항구적 독재를 지원하는 악의 축 동조역할을 해야 할 지경까지 간다.

 

3대 세습 정권의 지속은 탈북 러시가 확산되고 있는 북한 동포들에게는 비극의 지속인 탓이다. 북한 내부는 물론 중국 땅에서 유령신분으로 온갖 차별과 학대를 당하는 동포들의 처참한 삶의 시간을 확장한다. 그나마 대한민국에 들어온 수만명의 탈북자들 또한 희망 없는 날을 선사받기는 마찬가지다. 그 비극의 주연을 피할 수 없는 적임자가 장관으로 나선다. 통일부가 지금 그 일을 맡을 최선봉에 서려하고 있으니 허탈하다.

 

최악의 패가 차악의 패라도 되기 위해서는 새 통일부 수장의 전향적인 의식전환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변 4강국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평화운전 카드를 과감히 내던지는 일이 그 시작이다. 절대 변할 수 없는 386 정의의 눈으로 안타깝고 치욕스러운 일일 수 있겠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냉엄한 동북아 질서를 이제는 받아들이는데서 나아가 국정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친미 사대주의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미국을 비롯한 주변 4강국을 지렛대로 활용하는 전통적인 방식이 신선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최선의 방식이다. 미국은 전 세계를 큰 지렛대로 삼아 국익을 취하기에 우리 같은 처지의 작은 역지렛대는 상호 이익추구의 다른 말이다. 이 같은 상호 지렛대 효과가 시너지가 나면 시간이 걸려도 평화통일의 토대가 오히려 구축된다.

 

친일청산에 방해가 된 미국과 그에 합세한 권력을 에덴의 원죄처럼 간주하는 정의는 지금까지 의도했든 안했든 북한 독재정권을 정의로운 것으로 도왔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현대사를 친일매국세력이 온통 장악해 온 역사라고 단정 짓는 것은 그 연장선상에서 과오다. 이를 빌미로 과거정권 적폐청산 전가의 보도를 휘두를수록 정치적 이벤트 효과는 있겠지만 핵을 전면에 내세운 북한의 선군정치는 그 막강한 세를 묵시적으로 키운다.

 

386의 이념처럼 반통일·반민족 악의 축은 미국이 아니다. 그렇게 몰아가는 자신들이 바로 그 악역이 되고 있음을 모르는가. 시대착오적 망상을 온전히 버리지 못하면 통일 한반도의 아름다운 그림은 붓조차 대지 못한다. 용공분자로 낙인찍혔던 어제의 반국가사범이 시나브로 지금도 그 전면에 있을 수 있기에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역할에 대해 치열한 고민을 해야 한다. 천국행 티켓을 쥔 것처럼 착각한 지옥행 열차는 여전히 과속 질주 중이기 때문이다.

 

이인영 새 통일 사령탑에 간곡히 주문한다. 대북 관계 역시 일반 외교와 다르지 않게 대한민국 국익을 최우선 영혼의 가치로 삼아야 한다. 남북 관계라고 해서 포용이라는 이름의 현란한 간판으로 마냥 저자세를 취하고 받아주면 안 된다. 지금까지 천문학적인 국민혈세가 대북 평화운전 환상으로 인해 무한정 투입될 환경이 무수히 만들어졌다. 그 책임을 질 대안들이 없다. 잠재적 적(敵)을 마냥 살찌운 그 위험한 대가가 이미 재깍거리는 자폭장치라는 것을 살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