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교체 과정 역시 어떤 기업은 순탄하게 마무리를 지은 반면 어느 기업은 후계들 간에 이전투구를 방불케 하는 경영권 분쟁을 거치기도 했다. 경영권 분쟁이 현재진행형인 곳들도 존재한다. 결과나 과정이 어떻든 간에 한 기업에 있어 세대교체는 꼭 해야만 하는 ‘피할 수 없는 숙명’임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세대교체는 시간이 흐를수록 소비자의 취향이나 트렌드, 산업 생태계 등이 점차 빠른 속도로 변화하면서 주기도 점차 빨라지고 있다. 기업의 존속과 성장을 위해서는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젊고 능력 있는 인물이 적합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결과다. 변화에 발맞추지 못해 경쟁에서 밀려날 경우 최악의 상황엔 그동안 쌓아올린 공든 탑이 한 번에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도 세대교체 주기를 앞당기는 요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봤을 때 국내 제약업계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GC녹십자그룹(이하 녹십자그룹)의 세대교체는 상당한 우려를 낳고 있다. 타 기업들이 세대교체 주기를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과 달리 녹십자그룹은 신중해도 너무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다.

 

명분과 실리를 갖춘 훌륭한 후계자가 등장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녹십자그룹의 방향키는 여전히 1세대 경영인이 쥐고 있다. 현재 녹십자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는 창업주인 고 허영섭 전 회장의 동생인 허일섭 녹십자홀딩스 회장이 자리하고 있다. 녹십자홀딩스는 주력계열사인 녹십자의 지분을 과반 이상(50.6%, 3월 말 기준) 보유한 지주회사다.

 

반면 창업주의 차남이자 2세 경영인인 허은철 녹십자 사장과 동생인 허용준 녹십자홀딩스 부사장 등은 일찌감치 경영에 참여해 다양한 성과를 내고 있지만 지배력 측면에선 허 회장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다. 지주회사 지분율만 보더라도 허 회장은 12.16%에 달하는 반면 허 사장과 허 부사장은 각각 2.60%·2.91% 등에 불과하다. 두 사람 지분 모두 합쳐도 허 회장의 지분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지배력은 비록 미약하지만 이들 형제의 경영성과는 사실상 녹십자그룹을 지탱하는 원동력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수준이다. 특히 녹십자 경영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허 사장의 성과가 두드러진다. 당장 드러나는 실적만 보더라도 허 사장 취임 첫 해 1조1979억원 규모였던 녹십자의 매출액은 지난해 1조3697원으로 껑충 뛰었다.

 

허 사장은 특히 지금의 녹십자그룹을 있게 한 백신 분야에서 다양한 성과를 도출해냈다. 녹십자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헤파박스-B(1983년 허가)’라는 B형 간염 백신 자체 제조 기술을 확보하게 된 배경에도 ‘안정적인 백신 공급은 국민의 안전과 직결된다’는 허 사장의 굳은 신념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코로나 사태가 확산되자 곧바로 치료제 개발을 주도한 한편, 무상공급을 약속해 제약보국의 기치를 드높일 적임자로 평가받기도 했다.

 

허 사장은 녹십자그룹을 일군 창업주의 차남이다. 창업주의 유언에 의해 장남이 그룹 경영에서 배제된 상황에서 오너 2세 중 후계자로서 가장 확실한 명분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실적이면 실적, 기업 이미지면 이미지 등 녹십자그룹이 국내 제약업계를 대표하는 기업의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도록 기여했다는 점에서 실리적인 부분에서도 높은 점수를 부여할 만하다.

 

그럼에도 허 사장의 입지는 불안하다고 이야기해도 딱히 부정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룹 내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곤 하나 지배력 측면에서 봤을 때 허 회장의 의중에 따라 언제든 후계구도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칭송하는 ‘위대한 형제경영’이 실상은 ‘벼랑 끝 형제경영’에 가까운 셈이다.

 

형제경영의 수식어는 결국 허 회장의 손에 달렸다. 이미 그룹 경영에 깊숙이 개입해 있는 조카들이 탄탄한 입지를 구축해 놓은 만큼 반쪽짜리에 불과한 세대교체의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녹십자그룹은 날개를 달고 동시에 우리나라 제약업계가 진일보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다. 국내 제약사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조카승계’의 사례가 등장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