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외교안보라인이 총 동원돼 초미의 관심을 모아 온 이른바 북한판 옥토버 서프라이즈 불꽃이 지펴지지 않고 있는 국면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현실을 가늠할 수 있는 징검다리 가늠자다. 11월 대선직전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미국 방문 일정이 희미해지면서 문 정부의 아집에 가까운 종전선언 일정은 기약 없는 표류를 계속할 것으로 확실해 졌다.

 

백악관의 코로나 확진 사태가 겹치기는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운명을 좌우할 빅이벤트는 백두혈통과의 조우가 아닌 다른 방식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북한 이슈가 미국 대선판도를 바꿀 수 있는 획기적 시그널이 되지 못하고 변방이 된 느낌을 지우기 어렵게 됐다. 이번에도 우리만 큰 설계인 종전선언 행보는 속칭 김칫국만 먹는 격으로 떨어졌다.

 

국민이 비참하게 피살 된 시간에도 대한민국의 국정 수반은 유엔 화상총회 연설에서 종전선언을 이야기 한 것에 대해 돌아보지 않았다. 단순히 시간대가 겹쳤어도 최소한 민망해 했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북한의 만행에 의해 참혹하게 죽은 진상이 밝혀지지 않아 유족들의 오열과 분노 그리고 국민적 아픔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청와대는 보름 후 또다시 보란 듯이 종전선언을 재차 언급하는 이해할 수 없는 용기를 국민 앞에 보여 주었다.

 

대통령의 새벽 종전선언 언급 이후 청와대 인사들과 외교부 등의 핵심 고위당국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줄줄이 미국행 비행기를 탄 것이 착잡하기 그지없다. 전례가 보기 드문 미국 줄방문이 한반도 평화 운전자론의 재가동을 의미하는 애드벌룬을 띄우기는 했지만 백악관의 무관심만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 마지막 방점은 트럼프 대통령의 최고위 외교참모가 확인해 주었다.

 

지난 주말 로버트 오브라이언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내년 도쿄올림픽에 좌표를 설정하는 식으로 마치 마침표를 찍는 발언을 했다. 트럼프 행정부와 북한과의 핵담판에 대해 ‘기회가 있을 수 있다’는 말로 흐리며 던진 말이다. 옥토버 서프라이즈 열기가 고조된 가운데 나온 백악관의 종전선언 시간표는 이처럼 조용히 차가웠다.

 

우리 정부는 원하지 않아도 북한 비핵화와 연계돼 종전선언의 키를 잡고 있는 트럼프의 일정에 맞출 수밖에 없다. 나아가 종전선언 로드맵을 위해서라도 싫든 좋든 핵담판을 계속해 온 트럼프의 재선을 희망하는 길을 가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와 가깝지만 먼 묘한 관계로 지난한 외교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문재인 정부의 표정연기가 수준급이지 않으면 종전선언은 참극을 몰고 올 양날의 칼로 변했다.

 

따라서 종전선언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다 못해 위험하기 짝이 없다. 남북 간 평화를 갈구하는 국민들의 염원을 일거에 해소해 줄 것이라는 종전선언 로드맵이 순진한 우리만의 오판이었음이 북한의 요란한 한 밤 열병식에서 조차 그대로 드러났다. 북한의 핵무력 고도화라는 눈앞의 비극적이고 참담한 현실을 목도한 국민들은 핵 대공포에 빠진 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바이든 후보가 차기 미 대권을 잡을 경우에는 상황이 더욱 위험하게 꼬일 것으로 예상된다는 게 외교 소식통들의 확신이다. 이래도 자래도 종전선언의 자폭장치가 가동되는 수순의 운명을 피하지 못할 참담한 그림이다. 바이든 행정부라면 문 정부와 이념적으로 코드가 맞을 것이라는 예상은 순진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오바마 행정부에서 전략적 인내 프로그램 당시 부통령을 지낸 그는 트럼프 행보와 전혀 다른 정책을 취할 것이라고 선언해 왔다.

 

김정은 정권을 러시아 푸틴, 중국 시진핑과 함께 폭력배로 칭한 바이든 후보는 북·중·러에 강경모드를 취할 태도를 분명히 했다. 북한과 대화 테이블에 앉아온 트럼프를 노골적으로 비판해 온 그의 입은 우리의 평화 운전자론에 일침을 가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우리는 트럼프 행정부의 느긋한 올림픽 일정으로 종전선언에 대한 기대감을 접어야 할 뿐만 아니라 바이든 후보가 백악관 안주인이 될 때는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이에 대북 강온양면을 적절히 구사해 온 트럼프 행정부가 종전선언 카드를 쥐고 가는데 그나마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진짜 종전선언을 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착각하면 안 되는 냉혹한 결단이 지금 시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순진한 종전선언 로드맵은 한반도에 위험한 먹구름만 잔뜩 끼게 만들었다. 북한 핵 고도화는 차치하고 한반도를 직접 겨냥한 중국의 핵 무력과 최신 미사일들이 가공할 정도로 확대됐다. 친중정부임에도 우리식 종전선언을 좋아할리 없는 중국의 뒤통수 때리기다. 북한 재래식 무기조차 남한 전체를 커버하고 남을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것 역시 섬뜩하게 목도됐다.

 

한국만 남북군사합의를 순수하게 따르면서 무장해제 수준으로 발가벗었다. 5000만 국민은 북핵무기의 공포 속으로 온전히 들어간 것은 물론 전면전이 아닌 국지전에서 조차 늘 항복카드를 손에 쥐고 머리를 조아릴 비운의 국민으로 전락했다. 한 해 50조원이나 투입되는 세계 군사강국 6위의 화려한 그림은 온데간데없이 항복카드 속으로 속절없이 들어갔다.

 

우리 국민의 목에 칼을 들이대면서 남녘동포에 대한 애정을 운운한 것은 치를 떨 일이다. 50여만 국군장병의 목숨을 일거에 무력화 시킬 자신감이 넘쳤던 김정은의 핵무력 시범은 대한민국 안보 울타리를 파괴한 행위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치욕과 울분이 차올라야 정상이다. 그럼에도 유아틱한 종전선언 행보를 계속하는 것은 국가의 정체성을 땅에 떨어뜨리고 국민을 사지에서 꺼내지 않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국방력 천조국이라는 미국도 요격이 어려운 다탄두 ICBM이 공개되는 순간 비핵화는 몽상이 됐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김정은의 영리한 야욕이 끝내 관철됐음을 분명히 보았다. 북한 핵 정권이 존재하는 한 종전선언을 한다고 해도 김정은의 무력 품속에 국민의 목숨을 담보 잡혀야 하는 참극이다. 완전한 비핵화와 종전선언을 맞바꾸기 더 어렵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우리였다는 진실이 명약관화하게 드러났다. 유턴하지 않고 있는 폭주가 그래서 무섭다.

 

국제사회의 협조 속에 종전선언을 하는 것은 이상이 됐다. 국제사회가 한 목소리를 내주는 종전선언이라면 항구적 평화체체를 구축하는 길이라는 것에 원론적으로 이의를 달 수 없지만 이 원론을 파기한 주인공이 평화 운전자를 자임한 대한민국이기에 모든 신뢰가 무너졌음을 곱씹어야 한다. 종전선언은 더 이상 평화협정으로 가는 다리가 아니다. 종선선언은 사지가 묶인 몸으로 북한 정권이 원하는 모든 이권에 서지 않으면 안 되는 ‘불평등 문서’의 예고탄이 됐다.

 

지금이라도 종전선언 후 정전협정을 파기하고 종전협정과 평화협정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환상적인 몽상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의도가 선해도 결과가 악하면 최악이라는 것을 시급히 자인해야 할 심각한 국면이다. 전시 작전권 환수를 국정의 최대현안으로 내세우면서 그 작전권 자체를 무용지물로 만든 우매함을 전 세계 외교가가 비웃고 있는 상황이 보이지 않는가.

 

뻔한 최악의 상황이 나올 것을 예상하지 못한 과오가 분명히 있다. 나아가 그 과오를 알면서 정치적으로 활용했다면 용서받지 못한다. 훗날 일말이라도 과오를 씻기 위해서는 냉혹한 국제질서 속에서 반세기 넘게 평화를 유지케 한 현재의 정전협정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피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작금의 정전협정이 절묘한 힘의 균형 속에서 만들어진 가장 훌륭한 평화체제이자 통일로 가는 징검다리라는 것을 제발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