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각계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탈북민들의 스토리가 널리 알려지고 있지만 방송업계, 특히 연출 분야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굳힌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허영철 원코리아미디컴프로덕션 대표(57)는 국내 유수의 대기업 광고영상을 제작하는 등 오래 전부터 업계에서 유명인사로 통하는 탈북민이다.

 

허 대표는 생사를 넘나드는 탈북과정을 겪고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정착한 뒤 빈손으로 시작해 지금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기도 하다. 스카이데일리는 서울 교외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아 지금까지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던 그의 인생이야기와 향후 계획 등을 들어봤다.

 

 

“원래 탈북할 생각은 없었어요. 동료들이 반체제 사건에 연루돼서 탈북하게 됐죠. 고난의 행군 시기에 저는 자재업무를 봤어요. 연합회사라고 산하에 6개 기업이 있었는데 한국으로 치면 대기업 간부로 근무했죠. 우리는 식품회사였는데 사람들이 너무 굶어죽으니까 직원들만이라도 살리자고 해서 소고기를 나눠줬어요. 그런 행위는 북한에서는 용납될 수 없죠. 배급이라는 건 오로지 수령만 해야 하니까요. 식량을 나눠줬다고 개인우상화와 직권남용죄, 인민들에게 반체제를 부추긴 선동죄까지 묶여서 잡혀갔어요. 몇 명은 잡혀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죠. 두 번 다시는 감옥에 가고 싶지 않아서 저를 다시 체포하려는 자들을 따돌리고 탈북하게 됐어요.”

 

허 대표는 북한에서 대기업에 다니면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시련이 닥친 계기는 다름 아닌 ‘양심’이었다. 굶어죽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먹을 걸 나눠준 게 죄가 돼 1997년 첫 도강(渡江)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그는 탈북과정도 순탄치 않았다고 술회했다.

 

“탈북이 쉬운 사람이 누가 있나요. 준비하고 뛰어도 힘든데 저는 준비도 못 하고 나왔죠. 한겨울에 알몸뚱이로 도망친 격이었어요. 아내와 (두만강을) 넘다가 잡혔는데 호송 중에 보위부(비밀경찰) 요원들을 또 때려눕히고 도망쳤어요. 그 길로 며칠을 걸어서 중국에 가서 5년 동안 살다가 몽골을 통해 한국에 올 수 있었죠.”

 

허 대표에게는 탈북과정에서 말 못 할 아픔이 있었다. 당시 사건 전말은 어떠했는지, 심정은 어떠했는지 기자는 질문을 꺼낼까말까 고민했지만 평생 마음의 고통이 치유되지 않을 그의 앞에서 도의상 차마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 대신 그가 한국에서 처음 정착했던 도시 부산에서의 삶을 물었다.

 

“남들은 다 서울에 간다는데 일부러 부산에 간 이유는 다 있어요. 저는 군복무를 강화도 맞은편에서 했어요. 그때 서울, 경기도는 107mm 방사포를 쏘면 한 평방에 4발이 떨어진다는 말이 있었죠. 북한 정권이 마음만 먹으면 수도권은 재로 만들 수 있어요. 우리 가족은 여기에 살려고 왔는데 서울에 갔다간 죽을 게 아닌가요. 그것이 부산에 간 첫째 이유고 둘째는 부산이 영화의 도시, 영상의 도시인 점이었죠.”

 

허 대표는 동남지역 방언에 능숙했다. 북한 함경도 방언과 동남방언 억양이 유사하다고 설명한 그는 그래서 부산에 더욱 애착이 간다며 부산은 제2의 고향이라고 밝혔다.

 

“부산 사투리를 쉽게 배운 까닭은 함경도 사투리와 비슷해서죠. 그래서 오히려 수도권보다는 부산이 언어에 따른 이질감이 덜했어요. 부산은 제2의 고향이죠. 부산KBS에서 아침마당 리포터 겸 PD를 했고 울산KBS에서 생생투데이도 한 3년 정도 하면서 부산 영상업계 사람들은 거의 다 친구로 삼아놨어요. 지금도 부산에 가면 같이 공부하던 사람이 출세해서 회장도 하고 있어요.”

 

 

“하나원(탈북민 정착지원기관)에 있을 때 봉사단체가 많이 왔어요. 한 종교단체가 우리를 데리고 경주 탐방 등을 갔는데 그때가 S사 소형캠코더가 나올 때였어요. 그걸 갖고 찍는데 틀어보니까 영화 같더라고요. 또 하나의 계기는 제 아버지가 다큐멘터리 촬영제작소에 계셨어요. 그때 러시아산 영사기 등이 많아서 저도 다뤄보고 필름도 잘라보고 했던 집안 배경도 있었죠. 그러니 자연히 방송 쪽으로 가게 된 것 같아요. 다 운명인 것 같아요.”

 

호기롭게 방송에 도전했지만 처음에는 난관의 연속이었다고 허 대표는 밝혔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데다 북한에서는 컴퓨터를 접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디지털 촬영‧편집 등에 임하려니 주변의 만류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정착지원금의 상당 부분을 투자하면서까지 학구열을 불태웠다고 했다.

 

“서울 강남 대치동의 한 교육원에서 배웠어요. 그때 디지털 촬영‧편집 등을 가르치는 데는 거기가 유일했죠. 처음에 저는 컴퓨터 자체를 몰랐어요. 다른 교육생들은 다 대학졸업생들이어서 제가 많이 뒤처지니 가르치는 사람도 답답했을 거예요. 탈북자도 (교육생으로) 처음이고 컴퓨터 모르는 사람도 처음이었을 테니까요. 원장은 ‘이제라도 포기하면 돈을 돌려주겠다’고 했는데 자존심이 상하더라고요. ‘신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거면 하겠다. 내 돈 냈으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해 달라. 열흘에 하나 배워도 좋으니까 하겠다’고 했죠. 등록금으로 2000만원을 내고 개별교육을 받았는데 처음 한 달 동안은 컴퓨터 공부만 했어요. 두 달 후에는 프로그램들 공부를 했는데 영단어를 그림으로 생각하고 수천 번 뒤져보면서 부단히 외웠죠. 3개월 정도 지나니까 재밌고 쉬워졌어요. 졸업작품 낼 때도 우수평가를 받았죠.”

 

 

허 대표가 공부만 한 건 아니었다. 그에게는 당시 갓 태어난 딸이 있었다. 아내는 집에서 자식을 돌봐야 하기에 생계는 오롯이 그의 책임으로 돌아갔다. 교육생 시절 새벽에 일어나 늦은 밤까지 일하면서도 영상공부에 매달렸다는 그는 그러나 힘들지 않았다며 지금이 오히려 더 고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 우리 딸이 한 살이었으니 아내가 일을 못 했어요. 공부를 해도 가족은 먹여 살려야 되니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오전 7시까지 세탁물 배달일을 하고 100만원을 받았죠. 그 돈으로는 한참 모자라서 저녁에도 9시 반까지 한약을 배달해서 80만원을 받았어요. 토요일에는 교육이 없었으니 막노동을 해서 한 달에 총 270만원 정도 벌었죠. 일주일에 쉬는 날이 없었지만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서도 공부하는 게 재밌더라고요. 그때 5시간 자고 일하고 공부했는데 지금은 5시간은 고사하고 (일이 많아서) 3시간만 자요. 남들은 코로나 때문에 일이 없다는데 저는 일이 밀려요. 일이 좀 적당히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교육과정을 우수하게 수료하고 그가 만든 첫 작품이 단편 다큐멘터리 ‘뿌리’였다. 이 작품은 부산시네마영화제에 출품돼 창작상을 수상했다. 작품 내용을 묻자 허 대표는 ‘부친에 대한 기억’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아버지가 6‧25 때 북한 고위급 장성이었어요. 전쟁이 터지고 남진하다가 총 3발을 맞고 포로가 됐죠. 거제도에서 3년 있다가 포로교환 돼서 돌아왔는데 우리 아버지에게서 포로수용소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탈북 후) 가봤는데 너무 놀랐어요. 거기 보면 인민군 위령탑이 있는데 이해가 안 됐어요. 왜 적군을 위로하나 싶었죠. 북한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어요. 거제에 가니 아버지가 얘기한 역사가 다 있었어요. 그러한 것들을 보고서 ‘뿌리’를 만들었죠. 반세기 전 아버지는 포로라는 참담한 심정으로 거제행 배를 탔는데 나는 반세기 후에 관광객으로 배를 타고 갔어요. 극명하게 갈린 부자(父子)의 운명 속에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이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죠. 우리는 영원히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살아야 할 한 민족이라는 뜻이었어요.”

 

 

“문체부 문화 PD는 1년에 800명 모집해서 면접 후 40명만 뽑아요. 40명 중에서 10명에게만 최종적으로 PD 자격증을 주죠. 문체부에서 한 2년 일했는데 국립중앙박물관, 서초도서관 등 모든 문체부 행사를 촬영했어요. 여기저기에서 많이 일을 해봤는데 후회는 없어요. 다양한 체험을 했기에 노하우와 경험을 쌓지 않았을까 생각하죠. 그 과정에서 쌓은 인맥이 있기에 개인프로덕션을 운영해도 먹고살게 되는 것 같아요.”

 

허 대표는 교육원 수료와 거의 동시에 원코리아미디컴프로덕션을 운영해왔다고 했다. 10명 규모로 시작해 지금은 4명 정도 근무 중이라고 설명한 그는 S사 등 국내 유수의 대기업 광고영상 등도 작업했다고 밝혔다.

 

“개인프로덕션을 한 지는 16년 정도 됐어요. 2004년부터 시작했죠. 처음에 10명 정도 모여서 했고 지금은 4명이에요. 부산에서 처음 할 땐 (사명이) 하나영상이었고 서울에 와서 원코리아미디컴으로 바꿨죠. 부산KBS 등에서 일하면서도 운영했어요. 광고, 영화, 다큐 등 영상에 관해선 다 (작업을) 해요. 올해에 광고는 국방부, S전자, S호텔 등을 했죠.”

 

빈손으로 시작해 어느덧 영상업계 노장의 반열에 든 허 대표는 프로듀서 지망생들에게 하고픈 말을 묻자 ‘노력과 투자’를 주문했다. 그는 비단 방송업계 초년생들뿐만 아니라 모든 대한민국 청년에게 같은 말을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조언하고픈 건 (지망생들이) 편집은 잘 하는데 촬영은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촬영은 부단히 노력하고 시간이 지나야 하는데 그런 쪽에 힘을 쏟았으면 좋겠어요. 또 공부해야 한다고 봐요. 저는 내일모레 환갑인데도 공부를 해요. 장비, 기술 등에서도 모두 최고가 돼야만 해요. 투자하는 만큼 들어온다고 봐요. 낚시를 하자면 미끼를 던져야 하지 않나요. 세상에 진짜와 가짜는 있어도 공짜는 없죠.”

 

“보수는 현실을 인정하고 열심히 살자는 거고, 진보라는 건 평등과 분배를 중시하는데 평등‧분배는 북한이 이미 해봤어요. 똑같이 가난할 수밖에 없죠. 똑같이 부자가 될 수는 없지만 똑같이 평등하게 가난하려면 북한처럼 하면 돼요. 그러면 온 나라가 걸인 천지가 되죠. 일부 청년은 불만이 많은데 그건 사회 탓만 해서는 해결되지 않지요. 사회를 바꿀 수 없다면 나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고 봐요. 남보다 쉽게 돈을 벌려면 공부를 열심히 하면 돼요. 공부도 안 하고 노력도 안 한다면 못 버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싶어요.”

 

[오주한 기자 / 행동이 빠른 신문 ⓒ스카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