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창궐하던 지난해 8월, 이탈리아 중서부 해안의 유서 깊은 예술도시 피에트라산타(Pietrasanta) 키로(Kyro)아트갤러리에서 조각 전시가 열렸다. 소식이 유럽 예술계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바깥 외출조차 통제를 받는 엄중한 상황에서 열리는 무모해 보이는(?) 전시라는 점, 그리고 이전 작품 양식의 기조 위에서 진일보한 신작들로 전 세계 코로나 난민들에게 빛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운 전시가 아닐 수 없다. 지난 10년 동안 유럽의 대도시에서 가진 굵직한 기념비적 전시만도 40여 회. 그야말로 유럽을 누빈 작가의 커리어 가운데 불가피하게도 조촐한(?) 전시였지만, 가장 큰 의미와 보람을 가지는 이 전시의 주인공은 이미 유럽에서는 정상급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재이(在伊)작가 박은선(56)이다.

 

힘겨운 팬데믹 상황에 흥행은커녕 전시비용도 건지기 어려운 상황인데 초대형에다 새로운 컨텐츠와 메시지를 장착한 작품들로 저돌적인 전시를 감행하는 그의 배짱이 놀랍다. 어딘지 모르게 굴지의 모 글로벌기업 경영 전략과도 비슷한 데가 있는 것 같아 흥미롭다. 불황이나 환란에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아 더 과감하게 치고 나간다는 것이 말이 쉽지, 필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작가로서는 그것이 결코 무모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작업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수도 없이 겪어온 위기를 즐기듯 대처해 왔으며, 그것으로 지금의 유럽 정상급 작가의 반열에 오른 비결이기도 하다.

 

작가가 정착해 작업을 하는 곳은 피에트라산타이다. 세계적인 대리석 산지 까라라(Carrara)에서 남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소도시지만, 중세 이래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조각의 거장들이 작업을 위해 거치는 곳으로 유명하다. 헨리 무어, 마리노 마리니, 줄리아노 반지, 페르난도 보테로... 무수히 많은 거장들이 머물던 곳이다. 그도 그럴 것이 조각 제작에 관한 한 최고의 시설과 기술진의 인프라를 갖추고 있으며, 유명 휴양지로서 거장 예술가들이나 명사들의 별장들이 즐비하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유수의 갤러리들이 밀집해 있기도 하다.

 

이렇게 유서 깊은 예술도시에서 세계적인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록적인 활동으로 주목을 받는 작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경희대 조소과를 졸업한 그는, 93년 카라라로 유학을 가서 전업작가로 정착한 지 28년이 되었다. 사실 이탈리아 사회가 알게 모르게 차별이 적지 않은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난관을 실력으로 돌파했고 유럽에서 탑클래스의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성취와 국위선양의 위업이 인정되어 2015년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으며, 2018년에는 이탈리아 조각가들의 선망인 ‘프라텔리 로셀리(Fratelli Rosselli) 국제조각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필자가 오래 전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개인적으로 물어본 적이 있다. 조각의 본고장인 이탈리리아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냐고. 이에 작가는 말했다. “이탈리아 조각 전통과 역량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인데, 한편으로는 그것이 발전의 장애물이 된 것이다. 나는 그들이 전통에 갇혀 할 수 없는 나만의 것을 과감하게 저질렀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돌을 통째로 깎아내야 조각이라 생각하지만, 작가는 반대로 돌을 조각조각 내서 그것을 다시 조립하는 방식의 조각을 했던 것이다. 조각의 이단아처럼 보일 수밖에 없지만, 한편으로는 유니크하고 참신한 시도이자 충격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각 셀들이 조립되어 패턴을 띤 구체(球体)를 이루는데, 개체들이 독립해 있는 것 같지만, 구조적으로 하나의 유니트로 연결되어 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연출을 하게 된다. 무한의 순환 내지는 윤회라는 동양적 세계관도 엿보인다. 목조의 사개맞춤이나 전통 보자기의 구성이 모티브가 된 것으로도 보인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더러 흉내를 내는 아류작들이 보일 수도 있다. 작가는 여기에 자신만의 독특한 장치를 하나 더 삽입한다. 그의 작업에는 균열처럼 보이는 크랙을 의도적으로 설정하고 있다. 구조와 해체의 공존은 오늘의 패러다임이 피할 수 없는 모순이면서도 장점인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크랙의 스킬이야말로 흉내도 낼 수 없는 열쇠 같은 회심의 장치이다.

 

작가가 지난해 8월 전시에서 보여준 새로운 양식이 두루 회자되고 있다. 기존의 양식과 구조 내에 빛을 삽입한 것이다. 원래 작가의 작품 모듈마다 내부가 비어 있는데, 재료를 보다 투명도가 좋은 재료로 바꾸면서 환상적이고 영롱한 보석 같은 빛의 세계를 연출하고 있다. 셀과 모듈의 강한 유대와 결속을 통해, 보다 세상을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긴 어둠의 동굴에 갇힌 세계인에게 치유의 빛을 선사함으로써 이 고난을 이겨내도록 응원한다. 아울러 코로나 위기가 오히려 우리 대한민국의 도약 기회임을 암시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선보인 14m짜리 거대한 수직의 기념비가 높이 비상하고 있는 한국인의 기상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