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재현자연합(HRU)의 김태우(29·왼쪽)의장과 고한빈(28) 인사담당이 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입었던 복장을 입고 있다. 배낭, 탄입대, 철모, 병사수첩 등은 모두 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물건들이다. 무전기(왼쪽)의 경우 그 당시 모습 그대로 재현해서 만든 모조품이다 [사진=박미나 기자] ⓒ스카이데일리
“역사재현(歷史再現·Historical Reenactment)이란 말 그대로 역사적인 사건이나 시대상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줄여서 ‘리인액트먼트(Reenactment)’라고도 합니다. 정확한 재현을 위해 미국·일본·러시아·베트남 등지에서 당시에 생산된 물건을 공수하기도 하죠. 의복은 사료(史料)를 바탕으로 재생산합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인근에 위치한 카페에서 역사재현자연합(Historical Reenactor's Union, 약칭 HRU)을 만났다. 지난 2006년에 설립된 HRU는 우리나라 역사재현자(Historical Reenactor·이하 리인액터)팀들의 연합체다. 1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HRU는 생업을 따로 두고 취미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따라서 매달 한 번씩 주말에 회의를 하며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김태우(29) HRU의장은 중·고등학생 시절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같은 전쟁영화에 푹 빠져서 밀리터리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리인액트먼트의 목적을 전쟁 당시의 군인들의 삶과 전투를 정확하게 고증해 재현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저희들이 하는 리인액트먼트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와 베트남전쟁이요. 이를 위해 각 팀들끼리 1년에 3차례 정도 모여서 아르덴 대공세와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을 재현하지요”
김 의장은 이런 대형 행사를 개최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은 ‘장소 구하기’라고 말했다. 행사를 위해서는 야산을 낀 펜션을 구해야 하는데 이런 조건을 갖춘 펜션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나라의 역사재현자팀들의 연합체인 HRU는 지난 2006년에 설립됐다.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권기현(28) 부의장, 김태우 의장, 나기웅(35) 회원, 고한빈 인사담당, 차태경(29) 회원, 박종래(31) 회원 ⓒ스카이데일리
제2차 세계대전 완벽 재연 위해 뭉친 리인액터…매 행사마다 50~60명 운집
원래부터 역사를 좋아했던 권기현(28) 부의장은 역사적인 물품을 소유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사용된 물건들은 돈만 있으면 구입 할 수 있다는 장점에 이끌려 리인액트먼트를 시작하게 됐다.
권 부의장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초보 수준의 리인액트먼트가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에는 서바이벌 게임을 즐기던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시도하던 것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리인액터들이 팀 단위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입니다. 각자 좋아하는 미국, 독일, 소련 등 자신이 관심 있는 국가에 맞춰 팀을 이루기 시작했죠. 리인액터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재연하기 위해서는 개별 팀만으로는 숫자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미군이나 독일군들끼리만 모여서 하나의 전투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해서 겨성된 조직이 HRU이죠”
권 부의장에 따르면 리인액트먼트는 국내에서는 생소한 개념이지만 해외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취미다. 그는 리인액트먼트를 ‘낚시’에 비유했다.
“낙시와 리인액트먼트는 즐기는 사람은 적은 취미라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주말마다 집밖으로 나가고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을 쓰는 고비용 취미라는 점이 공통점이죠. 다만 외국은 리인액트먼트를 즐기는 인구가 많다보니 관련 시장이 활성화됐다는 점이 우리나라와는 다릅니다. 외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무전기 모조품을 쉽게 구할 수 있죠”
▲ 디데이(D-day) 행사는 지난 1944년 6월 벌어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재현하는 행사다. 매년 9~10월 경에 열린다. 올해 디데이 행사는 횡성의 한 펜션에서 개최됐다. 사진은 디데이 행사 장면의 일부 [사진=HRU]
권 부의장은 외국에서 하는 일부 행사는 일종의 축제로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관광 상품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외국은 행사 수준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개인이 전차를 소장하는 것이 가능한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행사를 재현할 때 보병과 전차가 어우러지는 모의전투를 벌입니다”
인사담당인 고한빈(28) 회원에 따르면 HRU는 매년 3차례에 걸쳐 큰 행사를 개최한다. 1~2월경에 개최하는 ‘벌지전투’ 행사, 5~6월경에는 ‘올리브 그린(Olive Green)’ 행사, 9~10월경에는 ‘디데이(D-day)’ 행사를 개최한다.
“올리브그린 행사는 베트남 전쟁을 재현하는 행사입니다. 올리브그린색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복식에 쓰인 표준 색상으로 미군뿐만 아니라 자유진영에서 미군과 함께 베트남전에 참가한 국가들의 공통 색상이었죠”
디데이 행사와 벌지전투 행사의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이다. 디데이는 지난 1944년 6월 서방연합군이 독일군을 물리치고 프랑스 북서부 해안가에 상륙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작전개시일을 뜻하는 단어다. 반면 벌지전투는 지난 1945년 1월 독일군이 연합군에 대해 마지막으로 공세를 펼친 ‘아르덴 대공세’를 이른다.
박종래(31) 회원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관련 행사에 참여하는 리인액터들은 주로 미군, 독일군, 소련군 역할을 한다. 반면 베트남전 관련 행사에는 미군, 한국군, 남베트남군, 영국군, 북베트남군, 베트콩 등 제2차 세계대전 행사보다는 다양한 국적을 표방하는 리인액터가 참여한다.
“큰 행사에는 50명에서 60명의 리인액터가 몰립니다. 이런 행사는 롤플레잉(Role-Playing·역할 연기 놀이)이 시행됩니다. 당시 참전한 군인의 프로필을 가상으로 만들고 그 역할에 맞춰서 전투를 합니다”
▲ 벌지전투 행사는 지난 1944년 12월부터 1945년 1월까지 벌어진 독일군의 반격 공세인 아르덴대공세를 재현하는 행사다. 실제 전투가 벌어진 시기에 맞춰서 매년 1월~2월에 재현 행사를 개최한다. 사진은 벌지전투 행사 장면의 일부 [사진=HRU]
“공익 위해 ‘더 많은 콜랙션, 더 많은 인원, 안정적인 필드(행사장)’가 필요해”
이날 인터뷰에 나온 유일한 여성 회원인 차태경(29) 씨의 입문 계기는 독특하다. 차 씨는 패션디자인과에 갈 정도로 옷에 관심이 많았다. 평소 코스프레(만화, 게임 등에 나오는 캐릭터의 의상을 입는 놀이)에 관심이 있었는데 현대적인 군복에 매력을 느껴 리인액터가 됐다.
차 회원에 따르면 국내 리인액트먼트는 열악한 상황에 처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국가의 특성상 리인액트먼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6·25전쟁 재현행사는 함부로 열지 못하죠. 6·25전쟁을 재현하기 위해 국군과 북한군의 복장을 한다면 북한군 복장을 한 리인액터는 의도와 달리 종북주의자로 몰릴 수가 있어요”
김 의장은 군인들과 생활양식 고증하고 따라한다고 해서 절대로 전쟁을 좋아하거나 찬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리인액터로 활동하면 전쟁의 실상을 더 자세히 파고들기 때문에 오히려 전쟁을 혐오하게 됩니다. 또한 조국과 민족을 지키기 위해 활약한 군인들의 희생을 기리게 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김 의장은 HRU가 공익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콜랙션, 더 많은 인원, 안정적인 필드(행사장)’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국내 리인액터들이 더 늘어났으면 해요. 또한 행사를 안정적으로 열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됐으면 좋겠습니다. 북미처럼 리인액트먼트 시장이 활성화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