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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연개소문은 657년에 사망했다”

657년 연개소문 사후에 장남 연남생이 막리지 지위 승계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기사입력 2019-02-16 13:10:00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삼국사기>와 중국 사서에는 연개소문이 죽은 년도를 백제가 망한 후인 보장왕 25년(666년)으로 기록한 반면, 민족의 성서인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에는 657년으로 적혀있어 9년 차이가 난다. 과연 어느 기록이 옳을까. 혹자들은 연개소문이 죽은 년도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으나, 고구려의 역사를 밝힘에 있어 이 문제는 중요한 역사의 키워드이다.
 
연개소문이 죽은 년도를 찾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자료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1927년 하남성 낙양의 북망산에서 발견된 ‘천남생 묘지명’이다. 원래 성명 연남생은 연개소문의 장자로 형제간에 골육상쟁이 벌어진 후 조국 고구려의 멸망에 앞장섰던 만고의 역적이다. 묘지명에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이 상세히 언급되어 있는데,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남생이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받은 벼슬은 정3품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겸 황실경호군의 검교(檢校), 종2품 상주국(上柱國), 작위는 백작 격인 변국공(卞國公), 추증된 벼슬이 병주대도독(贈幷州大都督)이다. 당시 당나라 최고의 대장군이었던 이정(李靖)과 이적(李勣)과 맞먹는 등급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치면 장관급을 뛰어넘는 부총리급이다.
 
성씨는 천(泉)이며 이름은 남생(男生)이고 자는 원덕(元德)으로 요동군 평양성 출신이다. 원래 성씨는 연못 연(淵)씨였으나 당 고조 이연의 이름을 피해 비슷한 뜻인 샘 천(泉)씨로 바꿨다. 증조부는 자유(子遊)이고 조부는 태조(太祚)로 다 막리지를 역임했고, 아버지는 개금(蓋金=연개소문)은 태대대로였는데, 조부와 부친이 쇠를 잘 다루고 활을 잘 쏘아 군권을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좌지우지했다.
 
나이 9살에 선인(仙人)의 지위가 주어지고 낭(郞)으로 임용되었으며, 15세에 중리소형에, 18세에 중리대형, 23세에 중리위두대형에 임용되었고, 24세에 장군 직을 겸했다. 28세에 막리지로 임용되었고 삼군대장군을 겸하더니, 32세 때 태막리지를 더해 군국을 총괄하는 아형원수(阿衡元首)가 되어 선조의 유업을 이으니 위중한 나라의 권력을 잡아 사람들의 논란이 없었다. 679년 정월 29일 병으로 안동부(安東府)에서 죽으니 46세였다.
 
▲ 천남생 묘지명에 있는 연개소문의 이름 [사진=필자 제공]
 
단재 신채호의 657년 의견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만약 연개소문이 보장왕 25년에 죽었다면, 연개소문이 죽기 이전에 고구려의 동맹국인 백제가 멸망했고 고구려의 도읍 평양이 멸망 전에 소정방에게 포위당했다는 말이 되고 만다. 그러나 만약 그랬다면, 당나라 태종과 이정 등이 무엇 때문에 고구려를 두려워하고, 소동파와 왕안석 등이 무엇 때문에 연개소문을 영웅으로 인정했을까”
 
“나는 연개소문이 죽은 년도가 660년 백제 멸망 이전이라는 가정 하에 그가 죽은 년도를 조사해봤지만 오랫동안 확증을 얻지 못했었다. 그러던 차에 근자에 하남성 낙양의 땅 속에서 발견된 연개소문의 장남 천남생의 묘지명에 따르면, 남생 형제의 분쟁이 666년 이전의 일이라는 게 명백해졌다”
 
“묘지명에는 연개소문이 몇 년도에 죽었다는 말은 없으나, ‘(남생이) 24세 때 막리지를 맡고 삼군대장군을 겸했으며, 32세 때 태막리지 지위가 더해져 군사와 국정을 총괄하게 되었다’고 했고, ‘679년 정월 19일 병에 걸려 안동부 관사에서 죽으니 춘추 46세였다’고 했으므로, 남생의 나이 24세는 657년이라는 말이 된다. 남생이 병권을 잡았다는 것은 그 이전에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직책이 남생에게 승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피력했다.
 
▲ 낙양 북망산에 묻혀있는 민족반역자 천남생 일가. 아들 헌성, 남생, 증손 비 [사진=필자 제공]
 
다른 한편으로는 남생이 태막리지가 되던 해인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지위가 남생에게 승계되었다고 보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겠지만, <삼국사기-고구려국 본기>와 <개소문 열전>에는 연개소문이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고 기록된 반면에, <삼국사기-김유신 열전>과 ‘천남생 묘지명’에서는 연개소문이 태대대로(太大對盧)였다고 되어있다.
 
또 <개소문 열전>에서는 서부대인 겸 대대로(大對盧)인 아버지(태조)가 죽자 아들 연개소문이 직위를 세습했다고 했고, ‘천남생 묘지명’에서는 증조부인 자유와 조부인 태조가 막리지를 역임했다고 했다. 이처럼 이 책에서는 ‘막리지’로 저 책에는 태대대로나 대대로로 표기되어있고, 다른 책에서는 태대대로 혹은 대대로가 막리지라고 했다.
 
직책 앞에 ‘태대’나 ‘대’자가 붙는 이유는 <삼국사기-직관지>의 기록처럼, 신라에서 각간 김유신에게 상을 내리면서 각간 앞에 ‘태대’ 두 글자를 붙여 태대각간의 지위를 부여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24세에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이 된 남생이 정권과 병권을 모두 장악했다는 의미이므로, 657년에 연개소문이 죽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만일 대로와 막리지가 같은 지위라면 “증조부와 조부는 모두 막리지를 맡았고, 아버지 개금은 태대대로를 맡았다”고 되어있는 ‘천남생 묘지명’에서 막리지와 대대로로 다르게 적힌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는 같은 직책임에도 ‘천남생 묘지명’ 상부에 적힌 지위와 하부에 적힌 지위가 다른 것과 같은 경우인 것이다.
 
막리지와 태대대로는 병권과 정권을 장악한 최고의 수석대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서-고려 열전>에는 “대대로는 국정을 총괄한다”고 했고, <당서-개소문 열전>에는 “막리지는 당나라의 중서령 병부상서와 같은 직책이다”고 했으니, 모두가 장군과 재상을 겸한 최고의 관직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657년에 연개소문이 죽자 장남 연남생이 아버지의 막리지의 지위를 승계했다가 9년 후에 태대 또는 대자가 붙여진 것이다. 기존 역사서를 근거로 666년에 연개소문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며, ‘천남생 묘지명’에 연남생이 대막리지가 된 해를 근거로 서기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연개소문의 죽음은 분명히 657년의 일이다.
 
어떤 사람은 “<신·구당서>에서 연개소문이 죽은 년도를 늦춰 666년이라고 한 이유와 ‘천남생 묘지명’에서 아버지가 죽은 년도를 쓰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고 당 태종이 눈알을 잃고 죽은 것과 당나라가 일부 영토를 뺏긴 것도 다 연개소문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당나라의 여러 신하들은 시각을 지체하지 않고 복수를 했어야 했다.
 
그런데 세월은 흘러가는데도 연개소문 생전에는 고구려에게 침략만 당하고 고구려 땅으로는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못했다. 이는 연개소문을 두려워하여 군주의 원수를 잊었으니,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이런 치부를 가리기 위해, 연개소문의 생전에 당나라 군대가 평양을 포위했던 것처럼 보이기 위해 그가 죽은 년도를 10년이나 늦춰 역사책에 기록한 것이고, 이와 같은 연개소문의 죽음에 대한 거짓기록이 중국에서는 실록으로 남은 것이라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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