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좋은 일만 시킨 안방 보톡스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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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좋은 일만 시킨 안방 보톡스전쟁

오창영 기자페이지 + 입력 2020-07-10 00:02:13

5년 넘게 이어져 온 메디톡스와 대웅제약 간 ‘보톡스 전쟁’이 마침내 결판났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예비판결에서 대웅제약이 메디톡스의 영업 비밀을 침해했다며 메디톡스의 손을 들어줬다. ITC의 최종판결은 11월 초로 예정돼 있으나 예비판결 결과가 번복되는 경우가 거의 없어 사실상 메디톡스는 대웅제약에 승리하게 됐다. 그러나 이번 승리로 미국 엘러간만 어부지리를 얻게 됐을 뿐 정작 메디톡스와 대웅제약의 입지만 약화됐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미국 ITC는 6일(현지시간) 메디톡스와 대웅제약 간 보툴리눔 균주 원료 도용 분쟁을 다루는 예비판결에서 대웅제약에 패배를 선언했다. 이어 ITC는 향후 10년간 대웅제약의 보툴리눔 톡신 ‘나보타’에 대해 미국 수입 금지 권고를 내렸다. 법적 구속력이 없는 권고 사항이긴 하지만 이번 판결로 나보타의 미국 수출에는 상당한 제약이 생기고 말았다.

앞서 메디톡스와 미국 기업 엘러간은 지난해 2월 대웅제약과 미국 판매사인 에볼루스를 미국 ITC에 제소했다. 대웅제약이 메디톡스의 보툴리눔 균주 원료를 도용했다는 이유에서다.

메디톡스는 예전에 근무하던 직원이 보툴리눔 톡신과 제품의 전체 제조공정 기술 문서 등을 대웅제약에 넘겼다고 주장했다. 반면 대웅제약은 국내 토양에서 해당 균주를 발견했다고 맞받아쳤다.

두 제약사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ITC는 지난달 초 예정됐던 예비판결을 연기하기에 이른다. 대웅제약이 예비판결에 앞서 해당 분쟁과 관련된 서류를 ITC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ITC는 서류를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근거를 들어 한달 정도 판결 일정을 연기했다. 대웅제약이 제출한 자료에는 메디톡스가 국내에서 무허가 원액으로 메디톡신을 제조해 약사법을 위반했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더불어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달 25일자로 메디톡스의 메디톡신 3개 품목에 대해 허가를 취소한 바 있다.

이번 판결로 메디톡스는 통상적으로 ITC가 한번 내린 예비판결이 번복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메디톡스 관계자는 “대웅제약이 메디톡스의 균주와 제조 기술을 도용했다는 사실이 이번 판결로 명백히 밝혀졌다”며 “이번 판결은 대웅제약이 수년간 세계 여러 나라의 규제 당국과 고객들에게 균주와 제조 과정의 출처를 속여 온 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대웅제약은 당장 미국에서 벌이던 나보타의 사업을 중단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나보타가 미국 시장에 진출한 지 1년 만에 강제로 철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셈이다. 수년 내 1000억원 이상의 수익성을 제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만큼 이번 예비판결은 대웅제약에 더욱 아쉽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대웅제약은 ITC의 판결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ITC가 자국 산업에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나보타의 미국 수입 금지로 가장 이득을 보게 될 곳은 메디톡스가 아닌 미국의 엘러간이다. 미국 최대 보톡스 제약사인 엘러간은 품질은 동등하나 가격 경쟁력이 뛰어난 나보타에 미국 보톡스 시장의 30~40%를 뺏길 것으로 우려했다. 그러나 이번 ICT 예비판결로 나보타의 철수가 불가피해지자 엘러간은 해당 시장을 독점할 수 있게 됐다.

대웅제약 관계자는 “ITC로부터 전달받은 예비판결은 미국의 자국 산업 보호를 목적으로 한 정책적 판단으로서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이다”며 “ITC로부터 공식적인 결정문을 받는 대로 이를 검토한 후 이의 절차를 진행할 방침이다”고 말했다.

대웅제약은 최종판결에서 꼭 승리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으나 판결이 내려지려면 아직 4~5개월을 더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ITC가 권고한 나보타의 미국 수입 금지 명령으로 전세계 보톡스 시장에서 대웅제약의 입지는 당장부터 크게 흔들릴 것으로 예상된다. 나보타가 최종판결 전까지 시장 점유율을 지켜 나가기에 무리가 따를 것이라는 우려가 터져 나오는 이유다.

더구나 메디톡스의 메디톡신은 미국 시장에 진출조차 하지 못했다. 메디톡스가 엘러간과 파트너십을 맺은 것은 2013년 액상형 보톡스를 기술 수출하면서다. 그러나 이 제품은 7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 FDA 허가가 계속 늦어져 아직 임상시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엘러간과의 파트너십이 활발한 것과는 별개로 메디톡스가 수익을 제고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 상황인 것이다.

ITC의 최종판결이 이대로 끝날 경우 엘러간은 이번 메디톡스와 대웅제약 간 안방 싸움의 최대 수혜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명목상 승리자인 메디톡스가 5년 간의 분쟁 끝에 큰 이득을 챙길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소송에서 패한 대웅제약은 나보타에 대한 제재로 사업 운영에 적신호가 켜졌다.

결국 국내 보톡스 제약사인 두 기업이 누구를 위한 소송인지 모를 소모전만 벌인 꼴이 됐다. 지속적인 대화로 현명하게 풀 수 있었던 보툴리눔 균주 원료 도용 분쟁을 두 제약사가 미국 ITC를 통해 지나치게 확대해 해결하려 했던 일은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오창영 기자 / 판단이 깊은 신문 ⓒ스카이데일리]

오창영 cyoh@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