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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결에 무슨 소리인가 들려왔다. 우웅…. 가까스로 눈을 떠 창문 쪽을 보았다. 바깥은 아직 컴컴했다. 몸은 아직 잠을 털어내지 못했고, 벽시계의 시침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숨을 토하면서 다시 잠에 빠졌다. 얼마나 흘렀을까. 언뜻 보니 커튼 틈이 부옇게 밝아져 있다. 그때, 나는 다시 ‘우웅’ 하는 소리를 들었다. 소리는 굵직한 저음으로 잘게 떨리면서 거실 쪽으로 열린 안방 공기를 때리고 있었다. 나는 귀를 세웠다. 이 시간에 무슨 소리지? 언뜻 듣기에는 우웅, 하는 단일음이다. 자세히 들어보니 저음 가운데서도 꽤나 다양한 음색이다. 우웅, 하는 소리 속에 드득, 하는 소리도 들어있고, 기이잉하는 긁힘 소리도 들어있다.
‘아, 제기랄, 이 시간에, 뭐야!’ 왈칵 짜증이 일었다. 도대체 새벽같이 뭐하는 짓이야! 퍼뜩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게 하루 이틀도 아닐 거란 말이지! 나는 홑이불을 뒤집어 쓴 채 눈알을 굴렸다. 윗층일거야. 주말 낮에 시도 때도 없이 피아노 쳐대는 걸 보면 몰상식하기 짝이 없는 윗층 여자가 신새벽에 세탁기까지 돌리고 있는 게 틀림없어. 관리소에 전화할까. 그래, 지금 몇시지? 6시 15분? 아이쿠, 세상에나. 아니, 그냥 윗층 올라가서 조용히 타일러볼까. 아니면. 엘레베이터에다가 호소문을 써 붙여? 온 동네방네 창피주는 효과도 있지 않겠어? 아내도 잠에서 깬 모양이다. 무슨 일 있어요? 했다. “당신, 윗집에서 탱크 굴러가는 소리 안들려?” “안들리는데!” “안들린다구? 냄새는 개코 뺨치게 잘 잡으면서 저 굉음이 안들린단 말야!”
이런 문제는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안돼. 며칠만 지나도 새벽 세탁 행사로 굳어질 거고, 그제서야 참다 못해 따지면, 그 동안에는 아무 소리도 안하더니만 이제 와서 새삼스레 따지냐고 뒤집어엎을 수도 있잖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다급해졌다. 아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상대의 어떤 알리바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그물망을 촘촘히 해야 해. 이건 흔해빠진 층간소음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라구, 사회문제!
나는 주방 쪽 냉장고 앞에 가서 귀를 기울였다. 우리집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는 윗집 세탁기 소음과는 비교 불가, 질적으로 양호했다. 아무렴, 재작년에 이사오면서 사들여온 무소음 신형 냉장고잖아. 나는 혹시나 하면서 발걸음을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환풍기 소리는 1도 아닌 줄 알지만 낱낱이 돌아봤다는 나대로의 알리바이를 공고히 하고 싶었다. 그리고 세탁기. 그래 세탁기 놓인 자리는 아파트 전 세대가 같은 위치에 있을 것이었다. 먼저 우리 세탁기가 서늘하게 정지 중임을 확인했다. 그런 후 천장을 노려보면서 귀를 귀울였다. 과연, 우웅, 하는 소리가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소리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그래, 소음도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야. 아니면, 윗집 세탁기 위치가 우리집 하고 다른 위치에 놓여 있을지도 몰라.
술 취한 강아지 지켜봐주는 일이 어렵겠는가
살금살금, 거실로 들어온 내 귀는 안테나처럼 천장 쪽을 더듬었다. 과연 윗집 세탁기는 거실 켠에 놓여 있는가 보다. 안쪽으로 올수록 우웅, 하는 소리는 커지면서 거실 공기를 들깨우고 있었다. 옳거니, 거실 쪽에 있는 게 틀림없어. 결국 나는 소음이 가장 큰 곳을 찾았다.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고, 바로 여기야! 나는 흰 천장 도배지 속으로 지금도 돌아가고 있을 몰상식·몰염치의 통돌이를 현장체포라도 한 듯 노려보았다. 일단 범행 지점은 잡았으니까, 호소문을 써서 엘리베이터에 딱, 붙여놓는 게 나답지 않겠어? 나는 서랍장에서 필기구와 종이를 꺼내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다. 그 순간 내 눈에 무엇이 들어왔을까. 아, 실내 분수대! 이 녀석…. 순간, 주저앉을 듯 맥이 풀렸다. 녀석은 연못에 앉은 큰 거위 모양의 실내 분수대였다. 나는 그 거위 뱃속에서 주먹만한 모터를 꺼내놓고 청소한 적이 있었다. 그래? 거위 녀석 모터 소리였단 말야? 나는 재빨리 실내 분수대 전원을 꺼보았다.
적막강산이 따로 없다. 거실의 모든 소음만 정지한 게 아니다. 남편의 탐정 놀음을 지켜보던 아내의 눈동자도 정지했고, 그 눈을 바라보는 나도 정지했다. 내가 살짝 넋나간 듯 말했다. “혹시, 당신 듣기에도 조용해?” 아내가 말했다. “당신 수행한다는 사람 맞아요?” 내가 말했다. “그니까 이만큼이라도 했지. 결국 내 안에서 범인을 잡았잖아.” “하이구, 어련하시겠수!”
소리는 어디서 나고 소음은 어디서 날까. 그라인더로 돌 깎는 석공은 그 소리를 소음이라 하지 않는다.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보장해주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래, 소리는 어디서 나고 소음은 어디서 날까. 윗집 세탁기라고 생각했을 때는 소음이었고 우리집 분수대 모터 소리임을 확인했을 때에는 소음도 사라지고 괴로움도 사라졌다. 윗집 세탁기를 본 적도 없이 ‘있다’고 확정짓고, 본적 없는 세탁기 소리에 괴로워했다. 심지어는 여름날 새벽 내내 고통스러워하기로 작정도 했다.
마음이 하는 일이다. 소리도 소음도 마음이 판별한다. 자기한테 좋은 것이면 마음은 음악으로 판단하고, 자기한테 싫은 것이면 소음으로 판단한다. 우리집은 좋은 것이어서 거기에서 생산된 소리는 소음이 아니다. 윗집은 나와 상관 없는 것이어서 거기에서 생산된 소리는 대체로 소음이다. 한번 생산된 분별심은 기억의 지원을 받아 긴 시간 흘러가거나 화석처럼 견고해진다. 이것이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 사용법이다. 명상은 그 사용법을 지켜보는 공부다. 그렇게 지켜보는 이유가 있다. 보다시피 마음은 술 취한 강아지처럼 대책없이 편파적이고 집착 덩어리이며 떠도는 분별덩어리들이다. 명상은 이것을 주의깊게 지켜봐주는 일이다. 그 뭐, 강아지 지켜봐주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는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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