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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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국민대통합위원회]
아이는 소반을 방 한가운데에 펴고 바닥에 놓은 방석을 두드리며 내게 앉으라는 손짓을 한다.
“내일까지 학교 숙제도 있는데 일단 숙제하고 공부 좀 하다가 저녁 먹자”
그러고선 자신이 먼저 책상에 앉아 책을 피고 곧바로 공부 모드에 돌입한다. 등판만 봐도 느껴지는 엄청난 집중력. 나는 딱히 할 것을 찾지 못하고 방 안을 더 둘러보다가 책꽂이에서 책 한 권을 빼서 읽기 시작한다. 문단마다 주요 문장과 주요 단어에 밑줄과 동그라미가 처져 있다.
“아빠는 책 읽을 때 연필로 줄을 그어가면서 읽어야 머릿속에 내용이 잘 들어오더라.
책을 깨끗하게 보지 마. 줄 빡빡 그어 가면서 읽어”
갑자기 오줌이 마렵다. 방문을 조용히 닫고 나와서 화장실을 찾는데, 웬 여자아이가 복도 끝에서 내 쪽으로 걸어온다.
“저기, 여기 화장실 어디 있어요?”
통통한 체형의 여자아이는 잠깐 너무나도 고모와 닮아 있는 짙은 쌍꺼풀이 진 커다란 눈으로 뚫어지라 나를 쳐다보더니, 알아차렸다는 듯 대답한다.
“아, 오빠 친구 맞죠? 화장실 저기에 있어요. 오빠 또 집에 오자마자 공부하죠? 맨날 전교 1등만 해야 하는 줄 안다니까. 하긴 서울 올라가서 대학교수 하고 싶다니까”
“아빠는 원래 교수가 꿈이었어. 그래서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너처럼 열심히 했지”
수행평가와 숙제, 시험공부로 밤늦게까지 자지 못하고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면 아빠께서는 딸이 열심히 공부한다며 뿌듯해하시기는커녕 오히려 방문을 열고 들어와 호되게 혼을 내셨다.
“아빠가 너보고 시험 백 점 맞아 오라고 그랬어? 아빠도 너처럼 밤새워서 공부해서 맨날 일등 했었어. 그러다가 고등학교 가서 지쳐서 제대로 못 했다고. 너도 이렇게 하다간 지쳐요, 지쳐”
아 또 저 소리. 딸의 건강을 걱정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건 이해가 가지만, 의사가 되려면 이렇게라도 공부해서 성적을 잘 받아야 하는 걸 어쩌란 말이에요. 나보다 잘하면서 더 열심히 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빠께선 모르시잖아요.
화장실에 들어와 바지를 내리는 순간 또다시 아까처럼 눈앞이 캄캄해진다. 이 상황에서? 이번에는 극심한 어지러움과 머리가 깨질듯 한 두통이 동반한다. 누가 계속해서 머리를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 같고, 눈은 튀어나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쑤신다. 가끔 두통을 호소하시며 “눈이 빠지는 것 같을 정도로 머리가 아프다”고 말씀하셨던 엄마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머리와 눈의 통증이 이윽고 가라앉고, 눈을 떠보니 나는 공원 벤치에 누군가와 함께 앉아 있다. 아까와는 다른 교복이지만 ‘전라고등학교 정승룡’ 명찰을 한쪽 가슴에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다. 어른이라고 해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커진 몸. 하지만 자신감에 차 있던 모습은 사라지고 축 처진 모습이다. 모래 위에 그의 것으로 보이는 안경이 떨어져 있어 그것을 주워서 그에게 조심스럽게 건넨다.
“안경……. 떨어졌어”
“누가 모른대?”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에 흠칫, 하고 놀란다. 마치 그릇을 깨뜨린 것을 아빠께 딱 걸렸을 때 ‘아, 이제 아빠께 혼나겠구나” 하며 한순간에 몸이 얼어붙는 듯한 소름 끼치는 느낌. 그가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본다. 어렸을 때 아빠께서는 혼내시던 도중에 아무 말 없이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시곤 했다. 그럴 때면 아빠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눈을 피했지만, 지금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은 피하지 않고 직시한다. 그는 이내 한숨을 쉬며 무겁게 입을 연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그는 한숨을 한 번 더 내쉬고 말을 잇는다.
“중학교까지는 분명 내가 매번 전교 1등이었는데. 주변에서도 모두 그랬고 나 자신도 내가 계속 잘할 거라고 믿었어. 근데, 중학교 때 맨날 놀던 애들이 정신 차리고 공부하기 시작하더라? 당연히 얼마 안 갈 줄 알았지. 인제 와서 정신 차리고 시작해봤자 쉽게 따라잡지 못할 거라고”
그는 말을 잠시 멈추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가 인상을 팍 쓰며 말을 잇는다.
“근데 그 녀석, 점점 성적이 올라서 날 따라잡더니 전교 1등으로 고등학교 졸업하고 좋은 대학 붙었더라. 난 고등학교 와서 점점 성적 떨어지다가……떨어지고 그 새끼가 붙었어. 지쳐서 그랬던 거야, 난. 그것도 그렇고……. 공부할 때 좀 더 지원을 받았더라면……”
대학교수가 되기를 꿈꾸셨던 아빠. 그만큼 유년 시절을 학업에 많이 투자하셨지만, 고등학생이 돼 잠시 방황하셨다고 한다.
“그래도 아빠는 할아버지께서 거의 지원해주지 않으셨어도 여기까지 왔어”
나는 아빠의 얼굴에서 순간, 할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이 잠깐 스치는 것을 보았다. 문득 아빠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서울에서 태어나 나와 똑같은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셨더라면 정말로 본인의 꿈을 이루시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에 마음이 미어진다. 지긋지긋하게 생각됐던 아빠의 잔소리들이 떠올라, 이제는 뼈가 저리도록 처절하게 와 닿는다.
누군가가 나를 흔드는 것이 느껴지며 또다시 시야가 흐려진다. 뿌옇게 흐려지는 것이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알리는 전조인지, 어느새 눈에 맺히기 시작한 눈물 때문인지 모르겠다.
열심히 노력하신 만큼 앞으로 더 대단한 일들을 이루어 내실 거예요. 제가 고등학생이 돼보니까, 지금 고등학생인 아빠 모습을 보니까, 그동안 아빠께서 왜 그렇게 잔소리하셨는지 이제야 알겠어요. 죄송하고, 감사해요. 아빠는 제가 가장 닮았고, 가장 존경하는 분이에요.
의식이 점점 돌아온다. 고개를 들어보니 사감 선생님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다.
“왜 자고 있어? 집에 가야지. 그토록 기다리던 귀가일 거 아냐? 부모님께서 데리러
오시니?”
“아뇨, 버스 타고 혼자 집에 가요. 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꿈이었구나. 나는 학교를 부랴부랴 나와서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탄다. 핸드폰을 꺼내 아빠와의 카카오톡 대화방에 들어가 본다. 회사에서 추진하는 사업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 홀로 중국에 파견돼 일하시는 아빠. 그래서 간간이 카카오톡 영상통화로 짧은 안부를 주고받고 있다. 매번 아빠로부터 먼저 영상통화 요청 메시지가 왔지만, 이번에는 내가 먼저 영상 통화 버튼을 누른다.
신호음이 몇 번 반복해서 들리더니, 조금 전까지 봤던 것처럼 느껴지는 얼굴이 화면에 나타난다. 아빠의 책상 위에는 “Chong Seung Ryong”이라고 쓰인 명패가 세워져 있다.
“예림이구나. 한 달 동안 학교에서 지내느라 고생 많았다. 귀가한 거니?”
“지금 귀가하는 길이에요. 너무 보고 싶어서 연락 드렸어요”
고등학생이 된 후로 아빠와 이야기할 기회는 훨씬 적어졌어도 더 깊은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됐다. 중간고사를 마치고 귀가했던 때가 우연히 아빠께서 잠시 귀국하셨던 시기와 맞아떨어져서, 주말을 온 가족이 오랜만에 함께 보냈던 적이 있다. 아빠께서 나를 학교까지 다시 데려다주시는 길에 말씀하신 것이 떠오른다.
“아빠는 항상 우리 딸이 자랑스러워”
나는 쑥스러운 마음에 얼굴을 붉히면서, “다 아빠 덕분인데요” 하고 대답했다. 아빠는 교문으로 들어가기 전 유턴을 하며 말씀하셨다.
“아빠가 항상 인생은 마라톤이라고 했지? 마라톤 경기를 보면 선수들만 있는 게 아니라 선수들 옆에서 같이 뛰는 코치가 있어. 그 코치는 선수들의 체력과 경기 상황을 잘 판단해서 선수들을 적절히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야. 아빠는 코치일 뿐이야. 선수가 열심히 하니까 코치도 그만큼 열심히 하는 것 아니겠어”
직접적인 표현은 항상 자제하시지만, 아빠의 말씀으로부터 나는 아빠께서 본인의 목표뿐만 아니라, 딸을 위해서도 열심히 뛰시겠다는, 아버지의 “사랑한다”는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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