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아빠와 친구처럼 지내는 친구들이 아주 부러웠어요. 아빠가 특별히 엄하신 분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아빠랑 거리를 좁히는 건 항상 어려웠거든요. 여자아이들이라면 아빠는 엄마보다는 아무래도 불편하다는 말에 다들 공감할 거로 생각해요. 주부이신 엄마랑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있는 시간이 길었고, 기숙사에서 활하고 있는 지금도 매일 10분 정도는 통화할 만큼 가까워서 내가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말씀드리곤 해요. 그래서 어떤 일이든 엄마랑은 마음 터놓고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만, 아빠는 조금 달라요. 아빠는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회사에 돌아오시는 터라 함께 있을 시간이 거의 없어요. 주말에 출근하지 않으신다 해도 나는 공부한다고 방에 박혀 있고 아빠는 텔레비전만 보고 계시니 아빠와 나 사이에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질 리 없겠죠.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을 보내고 내년에는 스무 살이 될 텐데 이대로라면 내년에는 아빠와 가까워지는 것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생각에 아빠의 어린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 몇 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빠에 대해 더 알아보기로 했어요. 아빠에게서 듣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아빠와 마찰이 생기는 그 이유에 대해서도 나름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외적인 것들에 대해 먼저 말해보자면 우리 아빠는 19살짜리 딸이 있다는 말을 하면 변에서 다들 놀랄 만큼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편이에요. 69년생이신데도 주름도 별로 없고, 머리숱도 많은 데다 흰 머리 한 가닥도 찾아볼 수 없어요. 키가 크신 편은 아니지만, 평균은 넘으시고 덩치도 있으셔서 아주 든든해요. 귀찮다고 아무거나 입으시지만, 열심히 관리하고 꾸미고만 다니시면 참 멋있을 것 같긴 해요. 리 아빠가 정말 좋은 이유 중 하나로 정말 말하고 싶은 건 아빠가 담배를 안 피운다는 거예요. 우리가 태어나고 나서 몇 번 끊으려고 시도를 하다 남동생이 태어나고 나선 완전히 끊으셨어요. 담배 끊는 게 그렇게 어렵다고 하던데 우리를 위해서 아빠가 끊었다는 게 정말 고마웠어요.

먼저 아빠와 학창시절 얘기를 나눠봤는데 가장 재미있었던 일화는 아빠의 일탈이에요. 아빠가 한 번은 DVD방에 가신 적이 있대요. 아빠 말로는 친구들에게 이끌려서 억지로 간 것이라 하지만 믿거나 말 거 나죠. 그때는 DVD방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서 부모님들이 못 가게 막았다고 하는데 아빠도 당연히 할머니, 할아버지 몰래 갔던 거래요. 근데 정말 운이 안 좋게도 아빠가 DVD방에 갔다는 사실이 할아버지 귀에 들어간 거예요. 그래서 엄청 혼나고 맞았대요. 나랑 동생들이 뭐 하나만 잘 못 해도 혼내시는 아빠도 고등학생 때 그렇게 할머니, 할아버지 몰래 하고 싶었던 것이 많았고 실제로 일탈을 즐겼다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아빠에게 공부는 어땠느냐고 물어봤는데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허세가 70%는 되는 것 같아요. 반에서 공부 엄청 잘했다고 자랑을 늘어놓으셨어요. 그렇지만 문과였으니까 수학 과목은 정말 싫어했대요. 이 점은 저랑 많이 닮은 것 같아요. 그것 말고는 배우는 건 다 달달 외우고 시험도 잘 봤대요. 근데 사실 좀 전에 말한 일탈 사건 때문에 다 믿기진 않아요. 아빠는 부산외국어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과를 학사로 졸업하셨어요. 그리고 대학원을 다닐 때 엄마랑 결혼하셨대요. 지금은 물어보는 것마다 까먹었다고 답해주시지 않지만 쑥스러워 그러시는 거겠죠?

아빠 이야기를 쓰려니 엄마와의 사랑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겠네요. 일단 우리엄마와 아빠는 6살 차이가 나는 커플이에요. 엄마는 75년생이세요. 엄마가 19살, 아빠가 25살 때 두 분을 모두 알고 있었던 엄마의 친구분 소개로 잠깐 만났다가 사귀게 됐대요. 엄마가 아빠랑 연애할 때는 지금이랑 달랐다면서 아빠한테 편지썼던 이야기부터 알콩달콩한 이야기까지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놀랍기도 하고 그렇게 빨리 결혼한 엄마가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어요. 그래도 결혼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두 분 사이가 좋으신 걸 보면 아빠도, 엄마도 서로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또 나도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고 주변에 연애하는 친구들이 많은 것처럼 아빠한테도 나만 할 때는 설레는 사랑 이야기가 있었다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조금은 신기했어요. 그리고 아빠의 부모님,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와 아빠의 관계에 관해서 물어보면서 새로운 걸 알게 됐어요. 사실 가족모임 때 아빠를 유심히 보면 할아버지와 거리가 멀어 보일 때가 많았어요. 할머니한테는 가끔 아빠가 애처럼 굴기도 하고, 말대꾸도 하면서 반항을 하는데 할아버지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았어요. 아빠한테 물어보니 할아버지는 정말 엄한 분이었대요. 할아버지는 공부를 정말 잘하셨고, PD, 고등학교 교사 등 여러 직업을 거쳐 지금은 회계사로 일하고 계세요. 매일 규칙적으로 생활하시고 엄격하세요. 아빠 말로는 자기가 어렸을 때는 진짜 무서우셨대요. 아무래도 아빠가 맏이였으니까 삼촌들이랑 싸웠을 때 아빠106 작은 실천, 큰 보람 운동 내가 쓰는 아빠만 혼난 적도 많았고 그래서 서운했던 기억이 많대요.

이건 엄마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엄마랑 아빠랑 하루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한 프로그램에서 연예인 부자가 출연해 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보았대요. 아빠가 엄마한테 거기서 두 사람이 부자지간에 벽이 없이 친구처럼 지내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고 부럽다고 하셨대요. 그러면서 자기도 아이들과 저런 사이였으면 좋겠다고 하셨다는데 그 말을 들으니 뭔가 짠했어요. 아빠는 그런 마음인데 내가 너무 아빠에게서 거리를 두고 지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아빠가 친근한 아빠가 되고 싶고 우리한테 다가오려고 하는 만큼 우리도 아빠한테 마음을 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리고 아빠의 회사 일에 대해 알아보았어요. 아빠는 지금 애니메이션 관련 회사에서 일하고 계세요. 사실 회사를 많이 옮겨 다니신 편이시고 지금 회사에서는 2년 정도 일하신 것 같다고 하세요. 아빠 말씀으로는 첫 직장이 가장 좋았던 것 같대요. 그때는 어린 마음에 회사 일이 힘들어 뛰쳐나온 것이 많이 후회된다고 하신다. 첫 직장을 그만둔 후에는 엄마랑 같이 식당을 하셨는데 엄마가 여동생, 남동생까지 낳고 나서 육아에 전념하면서 아빠도 직장을 다시 구하셨대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때는 매실 회사에서 일했었고 그때 아빠는 주말에만 집에 오셨어요. 기러기 아빠 생활을 꽤 오래 하다가 초등학교 6학년 때쯤 다시 서울로 직장을 옮기셨어요. 아빠는 식구들이랑 떨어져 살 때 많이 외롭고 힘들었대요. 밥도 매일 혼자 먹어야 하고, 잠자리도 집이 아닌 곳이다 보니 불편하셨대요. 그땐 저도 아빠가 많이 보고 싶고 그랬던 것 같아요.

아빠는 나이가 들어서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 일본어를 배워서 일본에 가서 새로운 직장을 찾고 싶다고 하세요. 처음 그 이야기를 하셨을 때 엄마랑 나는 말도 안된다며 믿지도 않았어요. 근데 집에 있는 일본어책을 뒤지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진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정말 일본에서 새로운 직업을 찾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요. 사실 조금 이해는 가지 않지만, 아빠가 무언가에 열정을 가지는 모습은 정말 멋있어요. 더 나이가 들기 전에 빨리 준비해보셨으면 좋겠어요. 또 아빠가 평소에 발명을 해보겠다고 아이디어 몇 개를 말씀해주실 때가 있어요. 회사에 다니고 계시긴 하지만 지금의 일이 힘들기도 하고 지겨우신가 봐요. 노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으시데요. 엄마 이야기로는 나이가 들면 도시가 아니라 시골로 내려가서 농사지으면서 살고 싶으시데요. 공기 좋은 곳에서 두 분끼리 지

내면 참 좋을 것 같긴 해요.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리고 평소의 아빠를 보면서 한 가지 안타까웠던 점은 아빠의 취미가 없다는 점이었어요. 딱히 특별한 취미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시데요. 회사 일에 많은 시간을 쏟다 보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빠가 시간을 내어 즐길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은가 봐요. 또 취미생활을 한다는 것이 비용을 수반하니까 주말에도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시거나 엄마랑 시가지에 다녀오시는 것 말고는 스트레스를 풀 만한 것이 많이 없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삭막하게 매일 회사에 가고 돌아오고, 또 다음날 회사에 가고 하는 생활을 되풀이하면서도 꿋꿋이 버틸 수 있는 아빠가 정말 멋있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어요. 내색은 안하지만 늦은 밤 자리에 누워 아침 일찍 일어나 강남까지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가는 게 정말 말할 수 없이 귀찮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도 시계추처럼 일하시는 아빠가 대단했고 감사했어요.

그래도 아빠에게 취미가 있다면 그건 노래 듣는 거예요. 최신 가요에는 별 관심이 없으시고 아빠는 옛날 노래를 좋아하세요. 전람회, 뱅크 같이 요즘 우리는 이름도 잘 모를 가수들 노래를 흥얼거리시고 밤늦게 틀어놓고 쉬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외국 팝송도 되게 좋아하세요. 한때는 아빠가 부르는 노래가 너무 좋아서 뜻도 모르고 따라 흥얼거렸던 적도 많아요. 또 야구 보는 것도 좋아하세요. 좋아하는 팀이 이길 때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좋아하시는 모습이 재미있어요. 롯데자이언츠 팀을 응원하는데 저도 아빠 때문에 지금 좋아하는 야구팀은 이 팀이에요. 해설가처럼 분석하면서 보시기도 하고, 야구 시즌만 되면 거의 매일 챙겨보세요.

아빠는 지금 친구랑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물어봤는데 사실 이건 좀 슬펐어요. 아빠가 부산에서 태어나서 대학까지 부산에서 다니셨는데 내가 초등학생 때 서울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지금 주위에는 친구가 거의 없대요. 서로 안 만난 지가 꽤 오래돼서 지금은 연락하는 친구가 한 명도 없대요. 아빠는 동호회, 산악회 같은 모임도 안 나가서 마음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친구가 거의 없어요.

그리고 나선 우리에 대한 아빠의 생각에 관해 물어봤어요. 우선 저는 첫째였으니까 신기했고 정말 좋았대요. 엄마 말로는 목욕시키는 것처럼 힘든 일은 엄마가 다했다고 하시는데 그래도 아빠 말로는 많이 아꼈대요. 아빠는 제가 상장을 받아올 때 제일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아빠도 그럴 때 좋대요. 아무래도 학교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는 증표니까 좋아하세요. 아빠는 그럴 때 말고 어버이날에 손편지랑 선물을 받을 때도 기분이 좋으시데요. 평소에 애교가 많은 딸이 아니라 편지에 담긴 글 하나하나가 좋으신가 봐요. 어릴 때부터 매년 어버이날, 생신 때 드렸던 편지를 안 버리고 다 모아두셨어요.

아빠랑 인터뷰하면서 둘이 함께 대화한 적이 정말 많이 없었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엄마의 어린 시절부터 많은 것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아빠에 대해서는 알고 있던 것이 많지 않았다는 걸 느꼈어요. 사실 며칠 전에 아빠한테 크게 혼나서 상처를 받은 적이 있어요. 길거리에서 꾸중을 들었고, 집에서도 같은 일로 혼났었는데, 내 기준에서는 혼날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아 엄청 억울했어요. 공부 때문에 혼났던 거라 속으로 아빠가 내 공부에 보태준 게 뭐가 있어 하는 생각으로 욕도 많이 했었어요. 그렇게 호되게 혼나고 나서 다시 기숙사로 돌아온 날 인터넷 검색 창에 무심코 ‘아빠가 너무 싫어요’라는 검색어를 입력해 봤어요. 포털 사이트에 그 검색어에 관한 게시글이 여러 개 있었는데 몇 개를 열어보고 나서 정말 많이 반성했어요. 게시글 몇 개를 보니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와서 아무 이유 없이 자다 깬

자기를 때린다는 아빠, 가족에게 무관심한 아빠 등등 정말 상상도 못 할 아빠 투성이었어요.

그런 아빠들을 보고 나서 우리 아빠를 다시 떠올려 봤는데 아빠가 내게 해줬던 99가지 좋은 기억들을 잊고 1가지 나쁜 기억 때문에 아빠를 잠시나마 미워했다는 것에 나 자신이 정말 미웠어요. 아빠는 내가 가고 싶은 대학을 말했을 때, 그 대학에 정말 가고 싶다면 직접 가보고 나서 준비를 해보는 것도 좋다며 먼 거리였지만 같이 가주셨었어요. 또 내가 아픈 날에는 늦게까지 잠도 안자고 같이 있어 주셨고 필요한 책이 있다 말할 때면 멀리 있는 서점이라도 직접 가서 사오셨어요.

엄마랑 학교 친구들 얘기를 하고 있다가 옆에 아빠가 와서 누구냐고 물어볼 때면 ‘아빠는 말해도 모르잖아’라고 대꾸하곤 했어요. 아빠가 우리 가족에게 가지고 있는 관심, 그리고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해왔던 노력에 대해 내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빠와 인터뷰를 하고 이야기를 쓰면서 아빠와의 거리를 좁히는 시작은 아빠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아빠도 나와 다를 것 없는 학생이었던 때가 있었어요. 아빠도 지금의 나처럼 공부에 힘들고 미래를 고민했던 적이 있었어요. 아빠의 고민을 내가 귀 기울여 듣고, 아빠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아빠와의 거리를 많이 좁힐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