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은 어떻게 대량학살을 낳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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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의 인문 책방…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아이히만의 전범재판과 악에 대한 새로운 접근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7-04-29 14:00:55

▲ 문화평론가 정현 ⓒ스카이데일리

악의 평범성. 유태계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아돌프 아이히만의 유태인 대량학살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다.

1960년대 초 유태인 대량학살의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뒤늦게 체포되자 아렌트는 ‘뉴욕 타임즈’의 승인을 얻어 아이히만의 전범재판을 취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죄 없는 이들을 대량학살한 범죄자의 정신은 어떤 것일까.

아렌트가 조명한 것은 악인의 정신병적 광기나 극단적인 혐오 감정이 아니었다. 악의 평범성. 한글말로 평범성이라고 번역되곤 하는 ‘Banality’는 맥락에 따라 ‘진부함’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악의 진부함. 아렌트의 눈에 비친 아이히만은 광인이 아니라 진부하고 어떠한 주체적 사고능력도 결여한 수동적 평범함을 지닌 인물이었다.

세기의 재판과 아돌프 아이히만

전후의 세계는 미국의 자유주의 문명을 중심으로 20세기 초의 양차 대전의 폭력성과 거리를 두고자 한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한 것이 바로 전범재판이었다. 아시아를 식민의 땅으로 흡수하고자 했던 이본의 제국주의를 먼저 전범재판의 도마 위에 올린다. 그리고 나치체제하에서 대량살육 전쟁을 벌인 독일이 전범재판의 대상으로 호명됐다.

전범재판의 대상은 대량살육 전쟁의 책임을 당시 정치책임자들에게 묻는 것이었다. 그런데 독일의 유태인 학살을 집행했던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은 전쟁이 종식되는 동시에 도피해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될 때까지 재판에 부쳐지지 않는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독일을 떠나 아르헨티나에서 숨어 생활하다가 1960년 이스라엘 정보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그야말로 세기의 재판이 열릴 참이었다. 유태인 학살을 지칭하는 당대의 명칭 중 하나가 ‘최종 해결(Final Solution)’이었다.

모든 혼란과 위기를 끝낼 나치 독일의 최종 해법이 바로 수십만 혹은 수백만 유태인의 대량학살이었던 셈이다. 이 최종해결의 책임자 아이히만은 어떤 재판을 받게 될 것인가. 그의 파렴치함과 극단적 폭력성은 어떤 정신세계에서 비롯됐던 것일까. 세간의 물음은 이런 것이었다.

한나 아렌트와 ‘악의 평범성’이라는 화두

아이히만의 체포 소식을 들은 철학자 아렌트는 고심한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유태인 철학자 중 한 명이었고, 무엇보다 인간의 정치적 행위의 본질을 탐색한 존재였다.

뉴욕타임즈에 재판에 대한 르포르타주를 기고하기로 하고 아렌트는 재판이 진행되는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런데 재판정에서 아이히만을 마주한 아렌트는 깊은 충격을 받는다. 모든 이들을 경멸하고 강인한 악의 풍모를 풍길 것 같던 최종 해결의 책임자 아이히만은 어수룩한 듯 바보 같고 출세만을 바라보는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자신은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자신의 사명은 관료체계의 상하위계를 잘 따르는 것이었다고 주어진 국가의 명령체계를 잘 따르는 것은 국가관료로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 순응의 대가가 수십만 혹은 수백만의 죽음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수룩하고 때로는 바보 같으며 흔하디흔할 만큼 속물적이기까지 해서 평범한 느낌까지 풍기는 그는 어떻게 해서 20세기 최고의 참사를 연출하게 됐는가.

여기서 아렌트가 꺼내드는 것이 바로 악의 평범성이라는 화두다. ‘약’은 비정상적인 폭력적 성격에서 비롯된다기보다 스스로 사고할 줄 모르는 무능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시키는 대로 하되, 그 순응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 진부함 혹은 평범성이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것이 바로 그 사고(thinking)와 공감의 무능력이다.

눈앞의 출세에만 매몰되는 이 속물의 무능력은 타인의 죽음이 야기하는 도덕적 책임을 생각할 여력이 없다. 아이히만의 폭군 같은 이미지를 상상하던 대중들은 아렌트의 이 해석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된다. 이 책은 출간 직후 유태인 학자들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기도 한다.

악의 실체를 축소했다는 것이 비난의 핵심이었다. 아렌트는 악의 실체를 축소한 것인가, 아니면 악의 본질에 다가간 것인가. 확실한 것은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악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강렬한 화두를 우리에게 남겼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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