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진보의 환상에 대한 발터 벤야민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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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의 인문 책방…발터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세계대전의 혼란기에 진보의 환상에 대해 묻다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7-05-13 18:10:36

▲ 문화평론가 정현 ⓒ스카이데일리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어느 날 오묘한 상상을 한다. 그 상상 속에는 천사 하나가 하늘 위에 애매한 자세로 떠 있다. 천사는 무언가에 쫓기듯 다급한 표정이다. 그리고 자신의 발 아래를 곁눈질로 내려다보고 있다.

천사의 날개는 천사의 눈이 향하는 방향과 반대로 기울어져 있다. 바람이 세차게 천사의 날개를 때리며 먼 곳으로 천사를 날려보낼 태세다. 폭풍이 부는 중이다. 폭풍이 불수록 천사의 마음은 더 다급해진다. 천사는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날아가길 원치 않는다. 바람은 불가역적인 힘으로 천사를 몰아붙이고 천사는 자신의 발 아래에서 고통스럽게 쌓이는 잔해의 더미들을 응시하고 있다.

벤야민의 이 이야기는 그가 죽은 후에 원고의 초고 형태로 발견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글에 실린 내용이다. 이 글이 쓰여진 시점은 1940년대 초·중반, 즉 2차 세계대전 말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과 150여년 전 세계는 영국을 기점으로 산업혁명이라는 경험을 했고 프랑스에서는 정치적 대혁명을 맡기도 했다. 미래가 창창할 것 같던 세계에 암흑의 그림자가 뒤덮인 것은 불과 100여년 후다. 두 번의 세계대전 앞에서 벤야민은 절망을 경험하며 원고를 쓰기 시작한다.

역사 진보의 역설

역사는 진보하는가. 이것이 벤야민의 물음 중 하나였다. 19세기 이후 많은 학자들이 역사의 진보에 대해 말해 왔다. 산업혁명으로 물질적 생산이 고도화되면서 모두가 부를 향유하거나 최소한의 노동만으로 행복한 생활을 영유할 수 있을 거라는 꿈에 부풀었다.

비슷한 시기에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됐다. 자연 생물은 진화한다는 것, 즉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변화와 발전한다는 것은 역사학뿐 아니라 생물학의 원리로도 승인되는 듯했다. ‘기술이 발달하고 사회는 풍요로워질 것이다. 발전하는 사회에 발맞춰 인간과 모든 자연 생물들 역시 진화할 것이다’ 이것이 19세기 이후 세계를 지배한 사고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자마자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 후 얼마간의 휴지기가 무색할 만큼 바로 세계경제 대공황이 생겨났고 역시 1차 대전보다 더 큰 규모의 전 지구적 전쟁이 연이어지게 된다. 나치는 수백만의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일본은 조선을 비롯한 식민종속국들을 강압적으로 지배한다.

사실 인류의 진보에 대한 회의감은 이미 19세기 중반에도 존재했다. 산업혁명을 이끈 19세기 영국사회의 주요 화두 중 하나는 노동시간 단축이었고 19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며 프랑스에서도 이미 사회의 근본문제로 ‘빈곤’이 화두가 되기 시작했다. 기술의 거대한 발달이 빈곤과 전쟁의 참상을 수반한다는 역설은 너무나 강렬했다.

벤야민의 천사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쓰게 된 것은 이러한 역설 속에서였다. 위에서 언급했던 천사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해당 글에서 벤야민은 천사를 저 먼 곳으로 날려보내고자 하는 폭풍이 곧 ‘진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가 발전할 것이라는 환상이 한편에 있다. 천사의 날개는 그 환상에 밀려 저 먼 곳으로 날려갈 참이다.

그런데 천사의 발밑에서 벌어지는 현실은 어떠한가. 빈곤과 장시간 노동의 고통, 세계대전과 경제공황의 발발, 파시즘과 식민주의의 대두 등 환상 이면에 놓인 ‘현실’들은 매우 비극적인 것이기도 했다. 환상은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긴다. 그러나 동시에 실제 현실이 처한 갈등을 볼 수 없게 하는 환각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환상이 이끄는 시대의 기류에 떠밀려 갈 것인가 아니면 발밑의 현실들을 직시할 것인가가 천사 앞에 놓인 딜레마라 할 수 있다.

OECD 가입국 한국의 역설

비슷한 역설의 상황이 한국사회에 이미 도착해 있다. OECD 가입국으로 경제대국의 반열에 오른 한국의 생존환경은 극히 척박하기 때문이다. 대선 내내 ‘청년’과 경제 살리기가 화두가 됐고 한반도 전쟁 위험은 상존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자살률은 이미 수년째 OECD 최고치를 기록 중이기도 하다.

통계지표 상에서 확인되는 엄청난 경제발전과 달리 정작 한국인들의 삶이 나아졌는지 의문을 가져볼만하다. 70여년 전 세계대전을 경험하며 썼던 발터 벤야민의 글이 오늘날 더 큰 울림을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태경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