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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深頌(심송)안호원 목사 (시인. 수필가. 칼럼니스트.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흔히 불가에서 눈 깜짝 할 사이를 찰나(刹那)라 한다.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시간을 탄지(彈指), 숨 한번 쉬는 시간은 순식간(瞬息間)이라고 말한다.
반면 ‘겁’(劫)이란 헤아릴 수조차 없이 길고 긴 시간을 일컫는 말이다. 실제로 힌두교에서는 43억2000만년을 한 겁이라 부르기도 한다. 참으로 대단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겁(劫)의 인연으로 표현하는 말이 있다. 500겁의 인연이 있어야 옷깃을 스칠 수 있고, 2000겁의 세월이 지나야 사람과 사람이 하루를 함께 하는 기회가 생기며, 6000겁이 넘는 인연이 돼야 하룻밤을 함께 지낼 수 있고, 억겁의 세월을 보내고서야 비로소 평생을 함께 살 수 있는 인연이라고 한다.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으로 치면 지금 우리 주위에 스쳐가는 모든 이들이 참으로 놀라운 만남이 아닐 수 없고 보통 인연이 아니다. 특히 나와의 인연을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 그것이 비록 스쳐가는 인연이라 해도 그들은 최소한 전생에서 1000겁 이상을 뛰어넘은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 아닌가.
그래서 우리의 만남은 존귀한 인연으로 소중한 만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가에서는 한 번의 옷깃만 스쳐도 500겁의 인연이 있는 것이라 했는데, 늘 함께 얼굴을 맞대고 때로는 살짝 웃음까지 지어 보이는 부부와의 삶은 얼마의 인연이 되는 것일까.
불가에서는 억겁을 거치고 나서야 한 평생을 함께 사는 부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지난 21일은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부부의 날이다. 그렇다면 서로의 부끄러운 곳까지 서슴없이 보여줄 수 있는 부부란 어떤 관계를 말하는 것일까.
부부는 영원히 남남이면서도 남남이 아닌 무촌(無村)의 관계다. 무촌의 관계에서 남녀가 사랑의 관계로 이루어지면서 한 몸이 되는 것이 바로 부부의 관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붉은 장미가 피는 오월이 되면서 청첩장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날아오지만, 우리 사회에도 ‘백년해로’라는 주례사의 인사말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시대가 도래됐음을 실감하게 된다.
최근 들어서 노년부부들 가운데 황혼이혼을 뛰어넘어 내 삶을 찾아 떠난다는 ‘졸혼’(卒婚)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고민을 하는 노년부부들이 늘고 있을 정도로 부부관계가 무너지고 있다. 법적 혼인관계는 유지하면서도 부부가 떨어져 독립한다는 졸혼.
오랜 시간 ‘검은 머리 파 뿌리가 되도록’ 함께 살자던 주례사도 마침표를 찍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 했다. 부부관계가 억겁의 인연이 무색할 정도가 돼버린 것이다.
졸혼이라는 단어는 원래 일본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가 쓴 ‘졸혼을 권함’ 이라는 책에서 유래된 말이다. 일본에서 황혼이혼이 급증하며 사회문제로 떠오르자 그 대안으로 나온 개념이 우리나라에 까지 번지고 말았다.
평균 수명이 100세 시대가 도래 되면서 결혼 이후 부부가 함께 하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늘어남에 따라 가족에게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찾고 싶다며 황혼이혼에 이어 졸혼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기 시작해 대책마련이 시급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해 전체 이혼의 약 30%는 황혼이혼인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30년 이상 함께 살아온 부부의 이혼율이 10년 전에 비해 무려 2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특히 자식들 출가 등에 문제로 이혼보다는 위험부담이 적은 별거와 같은 개념의 졸혼을 선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한 결혼정보회사가 부부의 날을 맞이해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졸혼에 대한 찬성이 57%, 반대가 40%로 나타났다. 졸혼을 찬성하는 이유는 ‘결혼 생활동안 하지 못했던 것을 노후에 하기 위해’, ‘사랑이 식은 상태로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게 힘들다’고 답 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고령화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황혼이혼과는 또 다른 가족관계를 보여주는 모습’ 이라며 ‘졸혼이 법적인 책임을 덜면서도 각자의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친 부부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법적으로는 부부이기 때문에 부모의 부양문제 등과 같은 법적의무에서 사사건건 충돌이 발생할 수 있음을 감안,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조언을 했다.
비록 한 몸으로 맺혀진 부부라 하지만 살아온 환경과 교육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간에 갈등을 느낄 수도 있다. 맘에 맞는 옷 하나 사 입는 것도 수월치 않은 세상인데 하물며 입맛에 맞는 사람을 그리 쉽게 찾을 수 있겠는가.
때로는 자신의 마음까지도 잘 모르는 세상 아닌가. 세상인심이 흉악해지고 자기중심의 이기주의로 인해 부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5월 가정의 달에 ‘둘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21일을 부부의 날로 정하고 기념을 하게 된 것 같다.
오죽하면 어린이날, 어버이날을 정한 것처럼 부부의 날을 정했을까.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부는 서로에게 맞춰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화음이 되살아나며 가정에는 화기가 돌고, 세상의 온도는 정상체온에 가까워질 수 있다.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헌신의 마음을 갖고 작은 욕심을 버려야 한다. 서로를 믿는 언약의 마음이 없으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없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믿고 신뢰해야 한다. 누구나 믿음과 사랑이 있으면 모든 것을 지킬 수가 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 자신을 완성시켜줄 배필을 통해 성숙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섞여 한 몸을 이루는 부부관계란 마음에 수양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 일간지에 56년을 해로한 잉꼬부부 백지용(80) 정민소(81)씨 부부, 5년 전 아내 정씨가 간암을 앓던 남편 백씨에게 자신의 간 70%를 떼어내 남편을 살렸다는 기사를 실렸다.
76세 간 기증과 이식은 세계 최고령 기록으로 미국 이식학회지에서도 사례로 소개될 정도로 희귀하다. 21일 부부의 날에 화목한 비결에 대해 정씨는 “남자는 항상 ‘아기’라 생각하고 보듬어야 한다”고 했다. 남편 백씨는 “아내 말을 잘 들으면 행복이 따라온다”고 화답했다.
황혼이혼, 졸혼을 막으려면 지금이라도 서로를 길들이려 하지 말고 길들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를 소유할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소유하려다 보니 다툼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서로에게 덕 볼 생각일랑 하지 말고 오히려 남편이나 아내에게 덕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을 하고 또 내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기보다 먼저 베풀고 나누는 그런 부부가 돼야 한다.
서로에게 감사함을 잊지 않고 느낄 때 그 사랑은 영혼하고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다. 늘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을 간직하며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 이란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백년해로 할 수 있다. 우리의 생명은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별을 할 시간이 온다. 세월이 흐르면 친구들도, 이웃도 모두 곁을 떠난다. 오직 끝까지 내 곁에 남아있는 사람은 가족이며, 부부다. 그런 귀하고 소중한 아내와 남편에게 감사를 느껴야 한다. 억겁의 인연이 마주한 부부가 아닌가, 그 부부의 인연이 어디 보통 인연이던가.
서로에게 귀한 존재로서 기억되기를 바라면서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부부로서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며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됐으면 한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3 : 3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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