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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리학자 김태규 칼럼니스트 ⓒ스카이데일리
바둑을 약간 둘 줄 아는 터라 며칠 동안 알파고와 커제의 바둑을 지켜보는 재미가 정말 쏠쏠했다. 그간 알파고가 인터넷 대국에서 정상급 고수들을 상대로 60연승을 이어왔기 때문에 커제가 승리할 것이란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만점이었다.
작년 초 알파고가 이세돌을 상대로 시합하기 직전만 해도 나는 인간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아시다시피 알파고가 4:1로 완승을 했다. 이세돌이 한 판을 이긴 것도 알파고의 시스템 버그 때문이었을 뿐 내용면에선 알파고의 압도적인 우세였다. 이에 시합이 끝나자 내 생각은 180도 변했다.
시합 전 나는 아들에게 체스는 몰라도 바둑은 인공지능이 안 될 거라고 호언했었고 이에 컴퓨터를 나름 잘 알고 있는 아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었는데 그런 내 생각이 참으로 민망할 정도였다. 나아가서 조금 더 지나면 바둑에서만큼은 인간이 인공지능을 이기는 일은 없으리라 하는 대단히 냉소적인 생각을 하게 됐다.
바둑에 대해 잘 모르는 대중들은 미처 느끼지 못했겠지만 바둑을 좀 아는 사람들에겐 알파고의 실력은 정말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시합 도중 유튜브나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해설을 맡았던 프로기사들의 말들이 얼마나 헛된 소리였고 심지어는 망언이었는지를 생각하면 한심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해설자들은 “이미 이세돌 9단이 이겼어요, 이제 잘 정리하기만 하면 됩니다”라는 식의 해설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세돌은 돌을 던지고 있었다. 더 이상 해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 반복됐던 것이다.
그런 일을 몇 번 겪게 되자 내 머릿속에선 적지 않은 일들이 발생했다.
전문가로서 해설을 하는 저 프로바둑기사나 변변치 않은 기력의 나 호호당이나 바둑을 잘 모른다는 점에서 오십보백보라는 생각이다. 심지어는 알파고와 인간의 격차에 비하면 같은 인간인 프로바둑기사나 나 호호당의 격차가 더 적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프로기사들이 한심해 보였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프로랍시고 조금 더 모르는 아마추어들에게 사기를 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예로부터 말하는 자는 뭘 모르는 자이며, 아는 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해설을 하는 프로기사들은 바둑을 잘 모르기에 저처럼 담대하고도 유창하게 저런 엉터리 해설을 하는구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순수하고 정직한 젊은 저 프로기사들 역시 스스로 그들이 바둑에 대해 참으로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자괴감을 당연히 느꼈을 것이다. 이에 저들이 느꼈을 좌절감 또한 실로 엄청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차라리 딱하고 안쓰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이후 나 호호당은 바둑에 대한 정나미가 떨어졌다. 잘 들르곤 하던 바둑 채널은 한동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간 전문기사로서 바둑을 해설해오던 너희들도 모르고 아마추어 기력의 나 호호당 역시 더 모르는 판국이라 아예 바둑에 대한 관심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내 나름 상당한 내상을 입었던 셈이다. 프로기사들은 더더욱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고 말이다.
그러면서 예전 기억들이 떠올랐다. 예전에 이창호 9단의 전성기 시절 해설자가 특정한 장면에 대해 의견을 물었을 때 이창호 9단은 한 번도 명쾌하게 답변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당시만 해도 그것을 이창호 9단의 겸손한 성격 탓으로 이해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정말로 이창호 9단은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최선이다 싶은 수를 지적해낼 수 없었기에 늘 우물쭈물 망설였던 것이다.
그런 이후 어쩌다 바둑 채널과 마주치게 되고 프로기사들이 해설을 하는 장면을 보게 되면 “여전히 헛소리하고 있네”라고 말하며 얼른 채널을 돌리곤 했다.
그런데 세상에선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일반 대중들이 신기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인간으로서 한 판이라도 인공지능을 꺾은 이세돌 9단의 인기가 엄청나게 치솟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대중의 인기를 등에 업은 이세돌은 CF 광고에 나와서 제품을 광고하고 있었다. 처음에 나로선 참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알 수 있었다. 대중들에겐 인공지능은 이미 절대 권력으로 각인된 참이었고 이에 그 횡포와 압제에 온몸을 사르며 맞서는 인간 영웅으로서 이세돌의 이미지가 순식간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경제가 어려워져서 일자리를 앗기게 될 것 같아 불안 초조한 마음에 장차 인공지능이 일반화되고 보편화되면 더욱더 왕창 일자리가 날아갈 것 같다는 대중의 불안감이 그것이었다.
이에 대중들은 이세돌에게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시포스가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끊임없이 산 정산으로 밀고 올리는 모습을 덧씌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 짧은 시간 속에 또 하나의 대중 종교가 우리 사회 속에서 창조된 셈이었다.
이처럼 인간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만났을 때 차라리 환상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나 호호당이 본 것은 고수 이세돌이 인공지능 알파고에게 무참하게 패배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패배한 이세돌이 대중들 사이에서 절대 권력에 맞서는 인간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리라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중에 보니 참 괜찮았던 대통령 노무현이란 사람이 아깝게 죽고 나자 졸지에 대중들 사이에서 더 없는 성군의 이미지로 각인이 되고 그로서 문재인 정권을 만들어내는 바탕이 됐으니 이 역시 동일한 사회현상이라 여긴다. 그러니 정치란 것 역시 일종의 종교적 현상인 것이다.
정치란 그 자체로서 일종의 대중적 종교현상이기에 처음엔 엄청난 기대를 하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그 이미지가 망가지고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한다는 실망감에 매장해버리는 것이 데모크라시 하의 대통령 선거이고 정권 교체가 아닌가 싶다.
대중의 간절한 소망을 담고 출발했다가 나중엔 대중의 원성을 해소하기 위한 살풀이용 제물로서의 대통령직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다. 무려 100년도 더 전에 영국의 인류학자인 제임스 프레이저가 남긴 ‘황금 가지’의 내용들이 다시 한 번 연상이 된다.
돌아와서 얘기이다.
이세돌과의 대국 후 알파고가 인터넷 바둑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아들 녀석의 귀띔이었다. 나는 열심히 유튜브에 들어가 알파고의 대국 기보를 감상했다.
바둑에 실망해서 바둑을 떠났던 내가 어느새 이번엔 알파고 때문에 또다시 바둑에 관심이 생긴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이번 알파고와 커제의 시합을 보게 된 것이다.
애당초 나는 커제가 한 판이라도 이길 수 있으리란 생각은 조금치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바둑 중계를 관전했다. 이번 나의 관심은 알파고가 보여주는 묘수와 새로운 수들에 관한 것이었다.
과연 알파고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알파고가 묘수를 둘 때마다 커제는 얼굴을 찡그리고 또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천재답게 명랑하고 경솔한 커제의 망가지고 일그러져가는 표정이 마치 고뇌하는 철학자 혹은 시인의 모습이었다. 이번엔 관전하는 재미 중에 하나가 될 정도였다.
프로 기사들은 커제를 응원했다. 같은 인간으로서의 동질감 때문이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난 응원할 마음이 없었다. 어느 정도 희망이 있을 때 응원도 하는 것이지 아예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기에 냉정히 바둑을 관전했다.
인간은 고정관념을 지니게끔 돼있다. 흔히 고정관념이라 하면 부정적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고정관념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 참으로 중차대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가령 유아들은 불의 무서움을 모른다. 그러다가 불에 화상을 입거나 화상은 아닐지라도 그 유사한 피해를 입고 나면 불조심을 하게 된다. 불은 조심해야 하는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게 바로 고정관념이다.
불이 났다 싶으면 재빨리 대피하는 것 역시 고정관념이고 관습화된 삶의 지혜이다. 그러니 고정관념은 우리 삶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기억이고 학습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나이가 들면 수많은 고정관념들의 집합체가 된다. 이를 우리는 상식이라 부른다. 상식은 일종의 고정관념인 것이다.
이에 프로바둑 기사들 역시 바둑에 있어서도 수많은 고정관념을 가진 상태에서 바둑을 둔다. 학습된 고정관념인 것이다.
그런데 알파고는 시합 때마다 프로 기사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이런 경우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하고 저런 경우엔 또 저렇게 대응해야 한다는 많은 상식과 지식의 고정 관념들을 알파고는 사정없이 무너뜨렸다.
프로그램인 까닭에 알파고는 인정도 감정도 없다. 당연한 일이다. 이에 알파고는 우리들의 고정관념들을 부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고 나자 바로 은퇴해버렸다.
알파고는 바둑에서 이기게끔 설계돼 있기에 이길 뿐이었다. 설계 자체가 이기는 것이니 그 결과 이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 알파고가 보여준 기술의 수준은 가히 신의 경지였다.
그런데 내 말 자체가 웃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낡은 고정관념 중에 하나가 바로 신이란 개념이건만 여전히 나 또한 알파고를 신에 비유하고 있으니 나 호호당 역시 종교와 감성의 동물인 인간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사실 알파고 그 자체는 별로 대단한 물건이 아니다. 컴퓨터 시스템의 발전 도상에 놓인 하나의 이채로운 이정표일 뿐이다. 하지만 작은 것들이 누적되다 보면 어느 순간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내듯, 우리 인간의 역사 또한 알파고로서 어느덧 또 다른 세상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느낌 지울 수 없다.
현대 사회에 들어와 인간의 값어치는 팔다리가 아니라 사유능력에 있었다. 그런데 알파고는 그 머리란 것이 과연 얼마만큼의 값어치가 있는가를 물어보고 있다.
머리 달린 인간, 즉 사유하는 고등동물 인간이었는데 이젠 그 머리 자체로선 별 쓸모가 없다면 우리는 또다시 새롭게 우리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고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알파고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김태규의 희희락락호호당
http://www.hohod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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