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마케팅 ‘자기개발’…우울한 긍정의 세계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전문가칼럼

정현의 인문 책방…김현미 외의 <친밀한 적>

‘기업가형 자아’…청년들은 어떻게 스스로를 착취하는가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7-06-10 15:19:53

▲ 문화평론가 정현 ⓒ스카이데일리

‘스펙’은 익숙한 단어가 됐다.

유독 청년들의 삶을 지배하는 어떤 강박과도 같은 느낌이다. 청년들은 스펙을 쌓기 위해 어학연수를 가고 봉사활동을 하며 주변에서 항상 경쟁의 ‘적’을 발견한다.

스펙 쌓기는 이제 시대의 상징과 같은 용어가 됐다. 청년들은 스스로를 하나의 제품으로 간주하며 자기 자신의 품질에 대한 내용을 이력서에 기록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나 주식회사’, 즉 스스로를 경영자의 마인드로 관리하고 계발해야할 사명이 스펙이라는 단어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청년들의 스펙 쌓기 역시 진화한다. 이제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은 스펙 쌓기의 범주로 소급되고 있다. 외모 관리와 금융상품 관리에서부터 타인과의 인맥관리까지 취업경쟁에서 살아남고 ‘위너’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은 관리돼야 한다.

모든 것의 상품화

스펙이라는 단어는 자아 자체를 계발하고 가꿔야 할 상품 모델로 간주한다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면접관은 면접자의 외모를 보고 면접자는 몸매와 얼굴을 바꾸기 위해 몸에 대한 투자를 본격화한다. 외래어 ‘피트니스(fitness)’라는 단어가 함의하듯이 몸은 자체 내의 건강보다 외부의 시선이 요구하는 어떤 모델에 적합해져야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가꿔지지 못한 외모에는 ‘스스로에 대해 무책임해 보인다’는 질책이 가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루저’라는 낙인이 수반되기도 한다. 얼굴을 성형하고 트레이너를 통해 몸매 관리를 받는 청년들에게는 외모 자체도 넓은 의미에서 스펙의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외모를 가꿔야 한다는 강박은 이른바 ‘뷰티 산업’의 부흥을 가져왔고 잘 가꿔진 외모는 자기계발을 향한 자아의 ‘진정성’이 표현된 것으로 간주된다.

일터가 아닌 일상의 모든 곳에서 금융을

취업을 위해 외모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자신을 계발하듯 이제 기업가형 자아는 자기 일상의 모든 터전을 투자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외모는 그 한 국면에 불과할 것이다. 보다 포괄적으로는 재테크라는 이름으로 일상에 침투한 금융투자의 세계가 있다.

이른바 재테크의 시대가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초중반이다. 그렇다면 20여년이 지난 지금 변화한 것은 무엇인가. 한국사회의 지난 20여년간을 특정지은 핵심 사항 중 하나는 근로소득의 상대적 감소라는 현상이었다. 일을 통해 임금으로 아무리 벌어도 집을 사기 위해서는 빚을 져야 하는 것이 서민들 일반의 미래가 됐다고 할 수 있다. 부동산 공화국 혹은 ‘임대업자가 꿈’인 이 나라에서 근로소득에 모든 미래를 거는 것은 무모해 보이기조차 한다.

“모든 미래에 대한 불안이 금융 시스템을 통해 보장되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녀 양육을 위한 ‘어린이 펀드’, 주택 마련을 위한 ‘장기 주택 마련 펀드’, 노후 생활을 위한 ‘연금 펀드’ 등에 가입했다”

이처럼 투자는 불안 속에서 번창했다. 아무리 일해도 은퇴 후 미래가 불안한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금융상품으로 몰려들었다. 요컨대, 세상은 일상의 모든 영역을 경쟁과 투자의 장으로 환원했고 불안은 시대를 지배하는 키워드가 됐다고 할 수 있다. 10%의 위너와 90%의 루저로 양분되는 세상에서 위너에 대한 주목만큼이나 루저에 대한 불안이 사회에 팽배하다는 점 역시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이른바 ‘힐링’ 산업이 번창한 것이 2000년대 이후의 일이니, 자기계발 열풍이 본격화된 시점과 얼추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수의 위너를 위해 다수의 루저가 배출되는 세계에서 이제 루저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 역시 상품으로 계발된다.

“행복, 웃음, 친절, 열정 등의 긍정적 정서가 중요한 감정 자원으로 논의되면서 불안, 슬픔, 우울, 무기력, 나태, 절망, 고통 등의 부정적인 정서는 각종 치유 산업과 의료 산업의 주요한 마케팅 대상으로 부상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고통들을 개인이 홀로 떠안는 것은 지난 20여년간 한국사회에서 만연해진 정서다. 개인주의라기보다는 차라리 고립주의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이 각자도생의 세계에서는 개인을 어루만져주는 사회적 관계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이 책은 이러한 경쟁과 자기계발 일변도의 신자유주의화 현상을 금융화, 이주문제, 외모관리, 감정서비스 등의 화두와 함께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무엇보다 이 모든 주제를 관통하는 화두 중 하나는 일상 자체를 상품의 공간으로 환원하는 신자유주의의 패러다임이다. 책의 제목이 말하듯 적은 아마도 외부가 아니라 일상의 내부에 이미 침투해 있는 듯하다.

고태경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