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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재벌개혁이 단연 화두다. 공정거래위원회 수장에 임명된 김상조 위원장은 국내외 언론들로부터 재벌 스나이퍼(저격수), 죽음의 신, 대기업 저승사자 등으로 불리기까지 한다. 참여연대에서 재벌감시단장, 경제개혁연대 소장 등을 역임한 김 위원장의 전력을 보면 이런 별칭들이 새삼스럽지 않아 보인다. 그는 확실히 문 개혁코드의 경제메스를 들이댈 칼을 받았다.
공정거래위원회는 흔히들 경제검찰로 불린다. 이는 공정위가 자동컨트롤 기능을 핵심가치로 여기는 자유시장경제체제에서 그 시장의 주인공격인 기업들을 전방위 감시하고 채찍까지 들 수 있는 막강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무소불위 금력(金力)으로 통하는 대기업이나 재벌기업들 사지를 언제든 묶을 수 있는 포승줄을 갖고 있는 곳이 바로 공정위다. 그 전가의 보도는 시장경쟁을 제한하는 독과점이나 불공정행위에 대한 단죄형식으로 번뜩인다. 대기업이나 재벌들의 ‘막후 파워’가 언제든 공정위의 오라에 묶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각별한 권력 때문에 공정위는 기업들을 옥죄거나 쥐어짜는 이른바 정권의 사냥개 역할을 해온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현 정권에서도 김상조 코드가 정권의 첨병역할을 하는 것은 짐짓 받아들일 수 있지만 역대 어느 정부보다 공정위의 선명성이 부각되는 만큼 재벌개혁 방향은 청와대 제2중대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자유시장에 반자유 시장개입 씨앗을 심는 명분에는 시장기능의 활성화라는 큰 그림이 대명제로 깔려 있어야 한다.
김 위원장이 재벌개혁에 앞서 경제활력을 먼저 꺼내들며 오너 총수들보다 전문경영인들을 만나 대화하고 자율개선을 주문하는 등의 행보는 그런 점에서 잘하는 일이다. 메스를 대려면 한국 자본주의 시장의 현재 틀을 정확히 보는 노력이 먼저다. 다시 말해 재벌개혁은 곧 우리 경제의 틀을 바꾸는 대전환이라는 것에 의미 있는 방점을 두어야 한다. 수술이 잘못되면 그 부메랑은 고스란히 국민들이 맞는다. 수술은 정확하고 일사분란하면서 실수없이 이뤄져야 한다.
그 전제조건으로 한국 자본주의에서 차지하는 콘체른(재벌)의 속성과 기능 그리고 역할 등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 시각은 엉뚱하게도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막시즘에서 출발한다. 한물 간 막시즘이 거론되는 이유에는 시장주의의 원천인 사유재산을 전면 부정하고 프롤레타리아(무산자) 독재를 거쳐 공산주의 이상사회를 설파한 막시스트-레니니스트(Marxist-Leninist)들 논거의 중심에 대자본가들이 지목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식으로 재벌인 대자본가는 공산주의 이행 전 단계에서 자본주의 내적 모순을 촉발할 뇌관으로 꼽힌다.
사실 독과점과 불공정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가장 위험한 내적 폭발물이 맞다. 거꾸로 이를 적절히 제어하는 것이 시장경제를 지키는 보루라는 점이 그래서 중요한 맥락이다. 하지만 역대 정권마다 공정위의 시장개입이 도를 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공정위의 시장개입 ‘미세조절 능력’에 우리 경제의 생사가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 들어 막스-레닌의 수정주의라고 할 많은 나라의 수많은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 정당들은 이처럼 시장주의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을 묵시적으로 당연시한데서 나가가 오히려 개입범위를 지속 확장시켜 나갔다.
정부 개입의 형태는 크게 나누면 간섭과 복지(투자)다. 공정위는 바로 대자본이나 콘체른을 견제하는 간섭역할을 해 왔다. 공정위는 자본주의가 막스의 확신처럼 필연적 자폭을 하지 않도록 인위적 시장조절기능을, 복지는 반시장주의 확산을 막는 선제적 예방기능을 담당해 왔다는 것이다. 복지투자의 경우 대공황이나 공황이 발생할 때마다 중앙정부의 인위적인 긴축들이 수없이 실패하면서 그것에 반사적 영향을 받아 유럽식 사회주의 시스템이 확산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영국의 노동당이나 독일의 최초 민주공화국인 바이마르공화국은 대표적인 긴축실패 사례다.
하물며 사회민주주의는 히틀러라는 전쟁광을 만들어 내기까지 했다. 바이마르공화국이 긴축실패로 무너진 자리에 파쇼의 상징인 독일의 나치당은 역설적으로 노동자와 농민을 내건 정책으로 독일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고, 곧이어 전 세계는 끔찍한 인간 살육장으로 변했다. 복지투자는 이처럼 사회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파쇼 통치에도 유용하게 통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노동자·농민 또는 무산자를 위한 복지투자는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성공을 거뒀다. 바로 그 복지투자의 중심에 대자본가들이 역할을 한 경우가 많았음은 사회주의 공동체의 또 다른 역설이다.
우리나라는 특히 대자본가와 권력이 짝을 이뤄 시장경제(계획경제)를 일으켜 세웠다. 재벌들은 권력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한국경제의 주춧돌을 쌓고 기둥을 박으며 서까래까지 올렸다. 이 과정에서 정부주도 내지 정경유착식 한국 시장경제는 서구의 사회주의와는 달리 노동자·농민이나 무산자들을 돌보지 않는 그림을 그려 나아갔다. 그것이 한국 자본주의의 치명적 약점이 됐다. 작금의 재벌개혁 화두는 그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개혁코드가 되는 것은 틀리지 않는다. 다만 이런 배경 때문에 재벌이 나쁜 쪽으로만 몰(沒)이해 되고 해체가 마땅하다는 식의 일방주의적 접근은 더 위험한 코드다.
한국 자본주의는 분명 완숙해 있기 때문에 재벌에 대한 무장해제식 개혁은 자칫 우리 경제의 경쟁력까지 뿌리째 건드릴 수 있다. 재벌의 지배구조, 후계승계, 투명성 등의 개혁이슈가 전 근대적 자본주의 상이라는 말 자체가 사실 틀렸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시작된 사회민주주주를 기반으로 한 유산계급(자본가)의 출현 당시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지금 우리보다 훨씬 비참하고 혹독해 무장봉기·무장투쟁만이 지고지순의 선으로 이행한다는 막스-엥겔스의 공산주의 이론이 맹위를 떨치게 했다. 하지만 대혁명 이후 19세기 말부터 노동자·농민의 제도권 진입이라는 보통선거권의 확대로 정부차원의 복지투자 재정이 합법적으로 가능해졌다. 다시 말해 신흥 유산자들로부터 합법적 약탈이라는 ‘징세’가 가능해져 프롤레타리아 독재 필요성이 점차 사라졌다.
오늘날에도 국가재정의 기본이 되는 재정은 기업 특히 대기업들 위주로 나온다. 소득세나 법인세, 증여세, 상속세 등이 출현한 것은 100여년 남짓이다. 귀족 이외의 신흥 유산자들의 탄생과 함께 그 중심에 있는 기업들이 납세역할을 해냈다. 오늘날 이들 국세는 당연한 사회정의의 기본 의무까지 됐다. 케인즈의 정부역할 경제이론이 더해져 세금은 오늘날 국가공동체의 금과옥조 바이블이 됐다. 그런데 국가의 노동강탈 성격이 있는 소득세·법인세 등의 국세가 납세정의로 변한 것은 대자본가 또는 대기업들이 기여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동자·농민의 이상사회(공산) 건설에 악마가 된다는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그 사적재산을 보유한 자본가나 주주들로부터 납세를 통한 부의 재분배가 정의로운 부분으로 자리 잡은 측면을 원천 부정할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재벌개혁의 화두는 따라서 흑백논리식 군중심리로 전개돼서는 안 된다. 불법적 대물림을 차단해야 하고, 재벌들의 갑질이나 문어발 확장 또는 일감몰기를 막아야 하며, 정경유착은 근절해야 하는 것은 분명 옳다. 이를 위해 정경유착의 온상이었던 전경련(한기련)도 간판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인 해체가 당연하다. 하지만 경제민주화라는 그럴듯한 포장으로 한국 자본주의의 맹아였던 기업의 기여를 전 근대적이라고 획일적으로 비판하거나 척결대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됐다. 경제민주화는 본래 노사화합의 절차적 의미일 뿐 재벌개혁 내지 해체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식 자본주의는 재벌의 순기능적 역할이 있는 것이 인정되는 가운데 성장했다. 최근 반세기 한국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도 알게 모르게 이런 부분을 부정하지 않아 왔음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3대 근간인 노동·토지·화폐의 완전한 탈상품화(반시장화)가 되지 않는 한 사적 자유재산을 누리는 유산자들은 부자든 서민이든 같은 배를 탄 공동운명체다. 지금의 집권당도 행보를 보면 그 범주에 있다. 대기업 존폐에 전방위 메스를 가하는 것은 그래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재벌개혁은 5000만 우리 국민이 모두 타고 있는 안방 자본주의 내에서 이뤄지는 우리 자신과의 싸움이다.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압축성장의 공든 탑을 쌓은 한국호를 현대판 유산 계급주의 대립사회로 만들면 침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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