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즘의 몰락…문학적 상상력, 명운 다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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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의 인문 책방…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

소설을 읽지 않는 시대…기원을 통해 보는 근대문학의 운명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7-07-22 14:46:53

지난 2014년 소설가 신경숙을 둘러싼 표절논란이 크게 점화됐다. 핵심은 1990년대 중반 발표한 소설 <전설>의 일부분이 일본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설국>을 거의 그대로 베꼈다는 것이 골자였다.

우리 문단이 한번 크게 뒤집혔다. 처음에는 소설가 신경숙의 도덕성이 쟁점으로 부각됐지만, 논의가 지속되며 쟁점으로 보다 근본적인 곳으로 향했다. 한국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 혹은 문학의 역할은 무엇일까. 신경숙 표절 사태를 통해 많은 이들이 다다른 물음은 이렇듯 근본적인 것이었다.

한때 대학가의 수많은 청년들이 심취했던 문학의 세계는 오늘날 매우 협소해져 있다. 읽는 사람만 읽는 것이 된 문학 시장은 일부 베스트셀러 작가를 제외하면 대중들로부터 철저히 괴리되는 게 현실이다.

우리가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18세기 이후 등장한 근대문학의 산물이다. 그 이전에도 극예술 등 여러 유형의 예술들이 존재했지만, 대화채가 아닌 3인칭의 화자를 수반하는 가상의 세계가 출판물로 공표된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문학의 탄생과 국민국가

소설을 뜻하는 픽션(fiction)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가상의 세계를 뜻한다. 그런데 이 픽션이라는 것은 단순히 아무렇게나 날조된 환상의 세계라고는 할 수 없다. 우선, 소설에 요청되는 덕목 중 하나가 바로 ‘리얼리티’다.

소설은 작가의 머릿속에서 가공된 내용이되,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 현실과 나름의 긴밀한 연관을 갖는 진실성을 갖추어야 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소설에 리얼리티를 부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감성의 공통점을 갖는 독자군의 등장이었다.

하나의 작품에 여럿이 공감하고, 그것을 현실의 일로 인지하기 위해서는 독자들 사이의 감성적 공통점이 존재해야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익명적 삶을 살아가는 근대사회에서 이러한 감성 공동체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국민’ 혹은 ‘민족’이라는 추상적 공동체였다.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며 시민권을 부여받은 국민들이다. 하지만 각자의 국민들은 서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한다. 학교에서 지도를 보고, 토끼 모양의 남쪽 한편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국민’이라고 막연하게 인지할 뿐인 것이다. 이러한 추상적 막연함에 감성적 구체성을 부여한 것이 바로 근대의 문학이었다.

근대문학의 등장과 몰락

근대문학의 등장을 가능케 한 것은 언문일치였다. 각 지방에서 다양한 형태의 방언을 사용하던 이들을 단일한 ‘국민’의 정서로 엮었던 것은 언문일치를 통한 표준어의 확립이었다. 언문일치로 통일된 공동체 정서를 갖게 된 ‘국민’들은 소설의 픽션적 세계 속에서 자신들의 자의식을 만들어 나갔다.

근대 소설의 시초로 평가받는 이광수의 <무정>부터 식민지 해방운동을 주도한 여타의 민족주의 소설들에 이르기까지, 근대 소설의 리얼리즘은 대체로 조국 근대화나 해방 등의 민족적 이슈와 연계돼 발전했다.

1970·80년대에도 한국의 문단에서 통용된 소설들은 대체로 국민적 공동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 속에서 발전했다. ‘리얼리즘’을 가능케 한 장치는, 앞서 봤듯 허구적인 대상을 그려내면서도 동시에 독자들을 하나의 공통된 경험적 감각으로 소환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진정성(진실성)이었다.

하지만 역으로 이는 이러한 공통의 경험모델들(민족·국민·노동 등)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근대소설의 명운이 다한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가라타니는 데이비드 리스먼의 개념들을 차용해 근대문학의 시대와 오늘날을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근대문학의 시대는 내면지향성을 갖는 시대였다. 사람들은 시대의 지배적 질서와 분리된 자신만의 가치규범(진정성)을 내면에 간직하고, 이것을 문학적으로 풀어냈다.

반면 오늘날의 삶을 추동하는 것은 내면의 진정성이 아니라 ‘유행’을 추동하는 타인의 평판이다. 공통의 내면 경험에 바탕을 둔 문학은 내면의 공통성보다는 즉흥적인 웃음과 즉물적인 유행을 추구하는 엔터테인먼트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이것이 소설을 더 이상 읽지 않는 시대, 즉 근대문학의 종언이 선포된 시대의 자화상이다.

고태경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