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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 삼성그룹이 총수를 비롯한 핵심 임원 4명까지 1심 선고공판에서 실형을 받아 지휘소를 통째로 잃었다. 삼성은 앞으로 상당기간 방황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삼성 경영 수뇌부들에 대한 단죄 죄목은 우리 경제의 고질적 병폐라고 할 정경유착으로 내걸렸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에 대한 결정적 증거 없이 단죄를 내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정치적·대중적 눈을 의식한 듯 법리적으로 모호한 상황을 연출했다는 점에서 2심까지 치열한 법리논쟁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우려되는 사안은 초일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그룹의 최종 결정권자와 이를 보좌할 컨트롤타워가 장기간 공석이라는 사실에 모아진다. 총수 유고시 이를 대리할 그리고 위험을 담보할 전문경영인 마저 모호해진 상태에서 삼성그룹의 향후 경영 향배가 사실상 안개 속으로 빠져들었다.
삼성그룹의 불안은 계열사 전반은 물론이고 직·간접 거래관계에 있는 수많은 중소·중견기업 전반의 운명까지 예측불허에 놓이게 하고 있다. 이는 한국경제 전반의 풍향까지 가늠치 못하게 하는 상황이다. 죄를 지었다면 당연히 단죄를 받아야 하지만 정치적·대중적 물증만 분명하고 법리적 물증이 애매한 상황에서 우리 경제가 이런 전방위 위험을 선제적으로 감수해야 하는지는 한번쯤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삼성의 단죄를 계기로 이젠 한국 사회의 본질을 냉혹하게 들여다보고 무엇인 진짜 정의인가를 짚어봐야 한다.
한국 기업 대부분은 크든 작든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 권력과 거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강력한 칼을 휘둘러 온 정치지형과 공무원 왕국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고 있는 공직 등의 한국형 권력지도 속에서 기업들은 울며 겨자 먹기 또는 죽기 살기로 정치권 또는 공무원들과 부정한 손을 맞잡지 않을 수 없다. 기업들은 존속하는 것 자체로 불법과 부정이라는 위험한 곡예를 수시로 타야 하는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목을 늘 내놓는 이른바 ‘죄수경영’을 자청해야 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든 정경유착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치열하게 물고 물리는 정경유착의 고리 속에 기업들이 얽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같은 정경유착의 매개는 당연히 돈이다. 권력은 돈을 필요로 하거나 돈을 거둬들이는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하고 있다. 기업들은 자발적·비자발적으로 블랙홀 같은 막강 또는 막후 권력에 돈을 은밀하게 상납해야 한다. 이런 고리가 우리 사회 전반에 거미줄 망처럼 엮여 있다. 이 같은 적폐청산은 당연한 일이고 시급히 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적폐청산의 요건에 크게 두 가지가 전제돼야 한다. 하나는 정경유착의 근원이 되는 요인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청산을 하려면 일거에 뿌리째 뽑아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지 의심스럽다.
우리 사회가 권력과의 거래를 온전히 청산할 준비나 자세가 안 돼 있다. 오히려 지난한 경쟁과 복수심리가 병마처럼 얽혀 있어 권력의 마수가 뻗칠 요소가 너무 많다. 치열한 경쟁사회일수록 권력의 비대화가 이뤄지고 그 속에서 정경유착의 씨앗이 더 크게 그리고 더 광범위하게 발아되기 마련이다. 한국사회가 바로 그 모습이다. 한국 사회는 오히려 권력의 먹잇감이 확산되는 모형이다. 경쟁에서 밀리면 낙오자 정도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죄인인듯 낙인찍혀 지옥의 문턱을 넘나든다. 권력이 이를 조장해 왔고 그리고 그 권력이 불법·부당의 목줄을 잡아 진액을 빨아 마셨다.
한국 기업들의 생존 조건은 공포스럽세도 정경유착의 불법·부당한 고리를 스스로 채우는데 달려 있다. 불법적 생존은 책임의 다른 말로 변했을 정도다. 다시 말해 살아남아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사회적 죄인이라는 쇠고랑을 채워야 하는 혹독한 환경이다. 어떤 사업이든 시작을 하는 순간 준범죄자 또는 미결수 반열에 오른다는 말들이 자연스럽게 회자된다. 한 의류업체 창업자는 기업경영을 투명하게 하기 위해 노력한 대가가 오히려 권력과 직원들의 반감을 사는 바람에 사업 10년차에 전과 15범이 됐다고 토로하고 있다. 이런 지옥 같은 마수는 대기업일수록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금력(金力)의 바퀴가 권력보다 먼저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 또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배수진의 선택일 경우가 많다. 특히 규모의 경제를 필요로 하는 대기업 장치산업들은 필연적으로 권력과 교분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경제는 석유화학, 조선, 자동차, 철강, 반도체 등 중화학 중심의 후발개도국으로 일어나 선진국 거대기업들과 경쟁했어야 했기 때문에 반드시 규모의 경제를 필요로 했고 그 중심에 바로 권력의 특혜를 원하든 원하지 않던 만들어진 정경유착 대기업들이 섰다. 한국 산업화의 선발주자들은 그렇게 필요에 의해 세워졌지만 선진 글로벌 기업들과 싸워 이겼다. 전 세계 가전시장과 반도체 및 스마트폰 등을 석권한 삼성은 그 대표적 기업이다. 이 과정에서 설사 삼성의 금력이 먼저 발동했다고 해도 그것은 목숨을 건 생존의 패가 넘실대는 과정이었다.
지금은 대기업 뿐만이 아니고 중소·중견기업 비즈니스 환경 대부분에서 ‘권력 모시기’ 또는 ‘권력의 횡포’ 현상이 24시간 꿈틀댄다. 이를 통째로 없애지 않고서는 대기업들의 정경유착도 뿌리째 뽑기 힘들다. 대기업도 방심하면 언제든 좌초하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이 정경유착의 상징이 된 듯 십자가를 지는 모양새는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에 낙담한 국민적 보상심리를 만족해 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정경유착 적폐청산의 기폭제가 될지는 솔직히 미지수라는 것이다. 삼성의 단죄와는 별개로 생활습관화된 수많은 적폐가 묻힌다면 정경유착의 생명력은 음지로 더 숨어 들어가 커진다.
글로벌 기업 지휘부의 단죄는 전 세계적인 경영공백이라는 위험스러운 방점 외에도 큰 죄인이 나오면 작은 죄인들의 양심이 가려질 위험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정경유착을 일소하는 길은 일거에 국가 사회를 투명화 하는 길에 달려있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대중적 눈을 의식한 단죄형식이 반복되면 정경유착 적폐청산을 방해하는 큰 장벽만 세우는 일이다. 큰 병폐를 들어 자신의 작은 병폐를 합리화 하는 의식이 독버섯처럼 번질 수 있다는 뜻이다. 불법과 부정이 난무하는 속에서 마치 정치적·대중적 재판 식의 단죄는 이런 부메랑을 낳는다.
권력은 늘 정의를 외친다. 하물며 군사독재의 전횡을 일삼았던 전두환 정권도 ‘정의사회 구현’을 가장 전면에 내걸고 무소불위의 칼을 휘둘렀다. 이처럼 도덕률은 권력을 강력하게 움직이게 하는 최선의 효율적인 도구다. 새 정부의 적폐청산 캐치프레이즈 또한 강력한 권력행사의 칼이 되고 있다. 그런데 권력가나 위정자들이 정의를 내세운 권력은 스스로 죄인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기막힌 역기능을 해오기도 했다. 삼성그룹의 정경유착 적폐청산 화두는 그래서 정의의 실현이란 측면에서 현실과 따로 노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뇌물과 횡령 등 마치 경제잡범으로 전락한 삼성그룹은 혹독한 최순실 게이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가운데 생존을 위해서는 또 다른 권력과 손을 맞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내심 운명으로 알고 있을 것으로 본다. 삼성은 수십만명의 직원과 수백만명의 가족을 거느린 거함인 탓이다. 현재 삼성의 진짜 위기는 위험하게 내던져진 운명을 피하는 선택에 있다. 따라서 삼성의 또 다른 생존 조건은 목숨을 건 또 다른 불법과 부정의 개연성이 열려 있을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또 다른 권력의 절묘한 먹잇감이 될 수 있다. 수뇌부가 무주공산인 삼성의 진짜 위기는 이런 권력의 칼을 피해 숨어 드는 결정을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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