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서 변화하는 언어로 본 현대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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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의 인문 책방…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해방>

언어는 사고를 반영하고, 행동의 역사를 이해하게 한다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7-09-30 21:23:35

독일에서는 권당 1000여 쪽으로 구성돼 총 8권으로 출간된 대작이다. 한국에서는 최근 들어 이 중 일부 개념만을 선별해 소책자형으로 출간하고 있다.

알파벳 A부터 Z까지 역사학의 주요 개념들을 다루되, 어학 사전처럼 간단한 정의만을 내린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의 역사를 풍부한 자료와 깊은 해석으로 해부한 책이다. 그야말로 역사적 대작이고, 현대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꼭 관통해야 할 책이다.

독일에서는 ‘역사의 기본개념’(Geschichtliche Grundbegriffe)이라는 이름하에 출간된 이 책들은 현대(modern)의 도입기인 18세기를 전후로 특정 개념들이 어떤 변모를 겪는지 분석하고 있다. 우리의 언어들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변화를 경험한다. 잠시 예를 들어보자.

한국어에서 ‘사회’라는 단어는 200여 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역 공동체만이 존재하던 시대에 도시의 익명적 개인들이 마주하며 만들어진 추상적 관계망을 인지했을 리 없을 것이다. ‘사회’는 개인들의 면대면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지역 공동체와 달리, 시장의 익명적 교환관계나 매스미디어나 온라인 등을 매개로 한 추상적 관계망에 바탕을 둔다. 따라서 그것은 철저히 도시화와 근대화의 결과물이다.

혹은 ‘상식’이란 개념은 어떤가. 지난겨울 광장의 촛불시위에서 ‘상식’이라는 개념은 사전적 의미 이상의 무엇을 함축했다. 예컨대, 상식이란 기본적으로 몰상식의 반대말이지만, 그 자체로 정치적 함의를 갖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촛불시위에서의 몰상식은 ‘국정농단’ 혹은 ‘적폐’라는 정치적 언어의 동의어로 이해되곤 했다.

언어의 의미는 시대의 흐름과 함께 변화한다.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 바탕으로 간주되는 ‘권리’라는 개념이 조선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현대의 언어들은 오직 현대사회의 시대사적 맥락 속에서만 그 온전한 의미를 갖게 된다.

독일의 개념사 변천

예컨대, 이 책들 중 하나의 제목인 ‘해방’을 보자. 해방을 뜻하는 독일어 ‘Emanzipation’는 라틴어 어원에서는 원래 ‘팔다’, ‘양도하다’라는 뜻을 지녔고, 17세기에 와서는 ‘과도한 자유를 누리다’ 혹은 ‘방종을 누리다’라는 부정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오면 의미는 세부적 뉘앙스에서부터 완전히 변화하게 된다. 아마도 프랑스혁명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구체제로부터의 단절, 신분제의 폐지 등으로 나타난 프랑스혁명의 경험으로부터 ‘해방’의 함의는 부정적 뉘앙스를 벗어던지기 시작한다.

1801년의 한 사전에서는 ‘부권으로부터 벗어나다’라는 의미로 의미에 미세한 변화가 감지됐고, 1820년대에 시인 하이네는 구체제로부터의 세계의 해방을 적극적으로 주문한다. 해방이 프랑스혁명의 영향 하에 근본적인 시대적 단절을 함의하면서 여러 함축적 내용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해방은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라는 관념을 수반하기도 했다. 구체제가 몰락하고 나면, 이제 신분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항구적인 해방의 환희와 억압에서 풀린 역량을 발휘할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리라 기대됐다.

“해방은 운동이자 목표의 개념이며, 결국에는 성취의 개념이 됐다. … 말하자면 과거와의 단절과 해방이 강조되거나, 아니면 미래 지향성과 목표, 즉 자유에 집중했다.” 프랑스혁명 이후 해방은 사회운동의 목표이자 자유의 이념을 대변한 언어가 됐다.

한국에서도 해방이라는 관념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된 것이 바로 지적 능력의 고취라는 관념이었다. 문맹상태의 1970년대 공장노동자들은 교회와 지식인들을 만나며 무엇보다 먼저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을 키우고자 했다. ‘교육’은 해방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으로 이해됐고, 사람들은 무엇보다 먼저 지적 해방에 심취하곤 했다.

지적 해방에 대한 심취는 19세기 독일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었다. 근대의 출발기에 사람들은 부패한 권력, 혹은 구체제의 위계적 세계질서는 지식의 잘못된 독점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배움이 자신을 자유롭게 하리라는 생각은 이때부터 ‘해방’의 새로운 의식을 고취하며 확산됐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렇지 않다고 답해야 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모든 언어는 시대상황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는 것이기에. 구글과 SNS에 넓고 얕은 지식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해방’은 또 어떤 의미를 띠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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