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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엉뚱한 얘기로 시작해본다. 얼마 전 트럼프가 북한에 대해 ‘화염과 분노’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 위협했을 때, 저거 어디선가 들어본 문구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Fire and Fury, Fire and Fury, 분명 들어본 리듬인데 하면서 몇 번을 입속에서 곱씹어보았으나 단서를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오늘 문득 알게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의 유명한 대사 속에 들어있는 한 구절의 변형이었다.
원 구절은 “sound and fury”인 데 트럼프는 ‘sound’ 대신에 ‘fire’로 바꿔 놓았을 뿐이다. 트럼프가 셰익스피어의 저 구절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확신이 없지만 말이다.
희곡 ‘맥베스’는 인간사 욕망의 헛됨을 주제로 하는 희곡이다. 자신의 무모한 야망에 부채질을 했던 아내가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다가 죽고 나자 맥베스가 하는 독백 속에 앞의 구절이 들어있다.
원 구절을 옮겨본다.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초라한 배우가
무대에 올라 으스대고 또 조바심하며 시간을 보낸 뒤
내려가고 나면 아무 것도 들리는 게 없으니 그건
그저 바보가 쓴 이야기, 소란스럽고 성화나 부려댈 뿐
아무런 의미가 없지.
(시는 원래 번역 대상이 아니라 여기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억지로 옮겨보았다.)
위대한 작가의 뛰어난 문학 구절은 은연중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법이다. 앞의 ‘sound and fury' 라는 구절은 나중에 미국의 노벨상 수상작가인 윌리엄 포크너의 대표작의 제목 “The Sound and the Fury”에 이어졌고 그러다 보니 트럼프까지 저런 레토릭, 언사를 쓰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나 호호당 역시 살다 보니 어쩌다 보니 셰익스피어의 작품들과 조우하게 되었다. 한 10여 전의 일이다. 나는 심심하거나 따분하면 가까운 강남 교보서점에 들르곤 하다. 그게 내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식이다.
그러다가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를 사게 되었다. 전혀 기대는 없었고 그냥 제본이 깔끔하고 분량도 적당해서 샀던 것 같다.
그런데 첫 구절부터 매료되었다. 아니, 셰익스피어가 이렇게 멋진 작가였다니! 하고 감탄했다. 그 바람에 나중엔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은 물론이고 그가 남긴 소네트 시집도 찾아서 읽고 즐기게 되었다. 줄여 말하면 셰익스피어를 만나서 좀 ‘놀았다고’ 하겠다.
나 호호당은 주변 사람들에게 여간해선 책을 강권하는 법이 없다. ‘이런 책이 있더라고’가 고작이다.
책을 만나서 읽고 또 뭔가를 느끼게 되는 일 역시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가령 짝을 찾는 사람에게 내 딴엔 어울린다 싶은 상대를 소개시켜주어도 대부분 허사로 끝나는 것처럼 책 소개 또한 어지간해선 헛일이라 여긴다.
서른 살 시절 셰익스피어를 잠깐 책방에서 접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이게 뭔 답답한 소리? 하면서 손에서 내려놓았었다. 그런데 오십이 넘어서 셰익스피어의 대표작도 아닌 ‘헨리 5세’를 만나서 뿅 하고 갔으니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이유를 생각해보면 결국 ‘30대의 나’와 ‘50대의 나’는 다른 사람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내 경우 50대가 되어서야 셰익스피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일은 뜻밖의 만남 즉 우연한 조우에 해당된다.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쩌다가 어떤 계기에 눈이 맞아서 커플이 되는 것과 같은 일이라 본다.
뜻밖의 일이라 하고 또 우연이라 말하지만 운명을 연구해온 내 입장에서 그게 그렇지가 않다. 그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 여긴다.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 나 호호당은 50대의 어느 날에 셰익스피어를 만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렇기에 30대 시절엔 그를 거부했던 셈이고 그렇다.
그렇다면 왜 나는 50대가 되어서야 셰익스피어를 만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내 경우 50대가 되어 그간의 인생 경험이 있었기에 만날 수 있었다고 해야 하겠다.
가령 30대의 나를 지금 60대인 내가 만나서 ‘맥베스’를 읽어보라고 권유한다 해보자. 그러면 30대의 나는 이렇게 대답할 지도 모른다. 좀 있어 보이네요, 하지만 아직 젊은 저에게 삶의 허무함을 얘기하는 것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네요, 산다는 게 걸어 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니 좀 있어 보이긴 하지만 사실 영 별로네요. 권해주시는 것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즉 thanks but no thanks 로 끝날 공산이 크다는 말이다.
그러면 60대의 나 호호당은 아, 그래? 그러면 나중에 봐 하는 정도로 그치게 될 것이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영화에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하는 대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보인 반응은 ‘저런 초짜 같으니’였다.
하지만 사랑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은 60대의 내 생각이고 30대의 나라면 영화 속의 젊은이와 똑같은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 역시도 일관된 내가 아닌 것이다.
조금 과장하면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 지금의 내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를 변덕쟁이라고 여기긴 싫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조금씩 그리하여 어느덧 많이 달라져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제 ‘맥베스’에 나오는 인상 깊은 구절 하나를 인용해본다. 1막 3장에 나온다.
If you can look into the seeds of time
And say which grain will grow and which will not,
Speak then to me.
너희가 시간의 씨앗들을 들여다보아
어떤 낟알이 잘 자라고 어떤 낟알이 아닐 것인지 알 수 있다 친다면
그러면 내게 말해주시오.
씨앗과 낟알이란 단어가 대조되고 있다. 무슨 씨앗? 바로 ‘시간’의 씨앗이고 낟알이다. 이런 대목이 셰익스피어의 뛰어난 재능이다,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여러 천년 동안 농사를 지어온 인류에게 있어 미래는 그냥 미래가 아니라 ‘씨앗의 미래’로서 낟알을 상정하고 있다. 씨앗을 보아 낟알을 알 수 있다면, 하는 이 말, 사실 나 호호당의 평생에 걸친 주제이고 화두였다.
나 호호당이 필생의 노력 끝에 알아내고 이에 이름을 붙인 ‘자연순환운명학’은 결국 씨앗을 보아 열매를 알아보자는 노력이기에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내 노력은 이렇다. 먼저 씨앗을 보아 열매를 알자는 것, 이어서 열매를 보아 이전의 씨앗을 보자는 것, 이어 씨앗과 열매 모두를 동시적으로 보자는 것, 또 씨앗이 열매로 변해오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보자는 노력이었다.
어떤 면에서 이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솜씨 좋고 경험 많은 농부가 씨앗을 보아 열매를 짐작하고 열매를 거두면서 씨앗을 짐작하며, 또 열매와 씨앗을 함께 보며 열매로서 그간의 기후와 일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니 사실 그런 일과 별반 다르지가 않다.
가을에 열매를 보면 그 속에서 씨앗을 얻는다, 그 씨앗은 다시 열매가 되고 또 씨앗으로 이어져간다. 끊임없는 일의 연쇄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앞서 있었던 일의 열매이자 앞으로 일어날 일의 씨앗이기도 하다.
처음에 한 권의 책을 만나지만 이윽고 책을 쓴 작가를 만나게 된다. 이어 그 작가와 직접 대면하진 않아도 문답을 하고 또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작가는 내 속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그러면 내가 변하게 된다, 나와 작가의 일부가 내 속에서 공존한다. 즉 조금은 작가화된 내가 생겨난다.
그런 내가 또 다른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또 다른 책과 만난다. 그러고 나면 과연 나는 누구일까? 내 속에 얼마나 많은 다른 이들이 있는 것일까? 그러니 그런 나를 두고 여전히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긴 추석 연휴의 서두에 작업실에 나왔다. 찌푸린 하늘 밑으로 빗방울 떨어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한가롭게 생각에 잠겨본다.
김태규의 희희락락호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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