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있지만 잠들어야했던 시대, 죄의식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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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의 인문 책방…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1970년대 후반 꿈꾸는 자들의 몸부림과 아픔…당면한 한국사회의 역설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7-10-14 13:08:19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어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 점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1980년에 발표된 이성복 첫 시집에 담긴 ‘그날’의 일부다. 당대의 여느 시인들처럼 그의 시 역시 첫 시집에 강렬한 감성과 호흡이 응축돼 있다. 아름다운 시집이고, 시의 호흡과 의식 흐름 자체가 너무나 독특해서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 시집을 처음 읽은 것은 2001년이다. 벌써 16년 전의 일이다. 발표 당시와 시대상황과도 많이 달라졌고 사람들의 감수성도 크게 변했던 새로운 밀레니엄에도 이성복의 시들이 준 감동을 잊기가 힘들다. 마지막 두 행은 그의 첫 시집을 특정짓는 가장 강렬한 시구 중 하나일 것이다.

깨어 있지만 모두가 잠들어야 했던 시대

시인이 이 시를 쓴 것은 1978년부터 이듬해까지의 무렵이다. 세상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흐름 속에서 가공할 속도로 변해갔다. 시인은 20대를 그 역동의 시기 속에서 보냈다. 압축적 근대화라고도 하는 이 빠른 변화의 시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빠르고 시끄러운 시대의 한 가운데에서 시인은 역설적이게도 어떤 침묵 같은 것을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집 전체를 보면 시인의 언어는 마치 잠꼬대를 하는 것과도 같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이란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안개는 우리 동네 집들을 / 가라앉혔다 아득한 곳에서 술 취한 남자들이 누군가를 / 불러댔고 누구일까, 누구일까 나무들은 설익은 열매를 / 자꾸 떨어뜨렸다”. ‘안개’의 어슴푸레함은 꿈의 ‘몽환’성과 닮아 있다. 누구인지 발신처를 알 수 없는 ‘술 취한’ 사내의 목소리는 잠든 듯 깨어 있는 시인의 귀를 차갑게 떄리고 지나간다.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공장이 들어서며 대중교통이 발달하면서 서울은 온통 시끄러운 공간이 됐다. 모든 것은 빨리 지나가 버렸고 시인은 그 빠름의 광포함에 떠밀려 거처를 잃은 듯 방황하기 시작한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서리 맞은 / 친구들은 우수수 떨어지며 결혼했’다(시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세월은 갔’고(시 세월에 대하여) ‘세상은 완벽’(시 그날)했으나 시인에게는 ‘어떤 말도 뜻을 가질 만큼 분명하지 않았다’(시 人生․1978년 11월).

잠든 듯 깨어 있는 자의 죄의식

모든 것이 완벽하게 보조를 맞추며 돌아가는 듯한 이 시기에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는 아무래도 이 몽환성의 정서와 깊게 관련될 듯하다. 모든 것이 완벽했지만 ‘어떤 말도 뜻을 가질 만큼 분명하지 않았’던 시대는 동시에 어떤 침묵의 모호함을 관통해야 했던 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시적 몽환성의 한 가운데에는 어떤 죄의식 혹은 불안의 흔적 같은 것이 있기도 하다. 시인은 끊임없이 ‘봉제공장 누이’의 새벽 환한 잠에 대해 말하고 ‘술 취한’ 사내의 흐느적거리는 목소리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말한다. ‘어떤 싸움의 記錄(기록)’이란 시에서는 아버지의 죽음을 방관하는 듯 한 시적 자아의 비겁함을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끝끝내 시집 전체에서 그 죄의식과 불안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어떤 몽환성과 안개 같은 흐릿함을 수반하며 우회될 뿐이다. 어쩌면 시집의 제목이 우리에게 또 다른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마치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말해도 직접적인 울림을 가져올 것 같은 이 제목은 시집 전체의 감성이 무엇을 향하는지를 알려준다. 모두가 분주히 굴러다니지만 동시에 아무도 깨어 있지 못하다는 역설, 모두가 말하지만 아무도 진실하지 못하며 모두가 병들었지만 아무도 아프다고 말할 수 없다는 역설은 동시에 시인이 직면한 당대 한국사회의 역설이기도 했을 것이다.

고태경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