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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의 메가 기둥 역할을 하는 글로벌 기업 삼성의 미래가 불안하다. 전 세계를 안방 삼은 삼성의 글로벌 그라운드 지휘봉이 기약 없이 쉬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이 3년 넘게 병상에 누워 있는 가운데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해 총수역할을 해 온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마저 1심에서 5년의 징역형을 받아 글로벌 CEO로는 어울리지 않게 민망한 옥살이를 하는 중이다.
이 부회장과 전·현직 임원진들에 대한 최종 단죄수준이 세간의 관심거리이지만 사실 초유의 최순실 사태가 삼성의 브랜드를 막장으로 몰아넣은 것이 참담한 이슈다. 이런 가운데 2라운드 항소심 공판이 다시 막이 올라 최고 사령탑의 부재 속에서 삼성이 다시 큰 시험대에 들었다. 이 부회장을 대신했던 총수 대행까지 삼성을 전격 떠나는 것 또한 선장이 온전히 사라지는 초유의 일이다.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3분기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전 분기 연속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려 팡파르를 올린 당일 이해하기 힘든 용퇴를 선언했다. 권 부회장은 인사적체 해소를 통한 삼성의 진용 재정리를 통한 전열 재정비를 사퇴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왠지 수긍이 가지 않는다. 이건희 회장의 병상투병 이후 임원진 및 간부 등에 대한 인사적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장기간 총수 부재인 지금은 변화보다 안정을 꾀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옳다. 권 부회장의 사퇴는 오히려 무책임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권 부회장은 삼성의 오늘이 있게 한 핵심 인사 중 한명이다. 그는 지난 1985년부터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연구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 당시 고 이병철 회장이 이끌던 삼성이 반도체에 도전하고 나섰을 때 정부, 언론, 재계는 물론 국민들까지 모두 비웃었다. 우리보다 앞서갔던 일본은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대기까지 했다. 삼성의 사운을 건 반도체 투자에 대해 ‘돈을 너무 벌어 미쳤다’는 소리까지 듣던 이병철 창업주가 고군분투하다 87년 말 운명하면서 이건희 회장이 바통을 받았고, 그 곁에 권 부회장이 있었다.
반도체 도전 10년 뒤 삼성은 정말 아무도 믿지 못할 기적적인 뉴스를 만들어 냈다. 우리 국민 모두가 눈과 귀를 의심해야 하는 소식이었다. 일본을 도저히 넘을 수 없다는 인식이 너무나 당연시 됐던 당시 드디어 일본을 제치고 1994년 세계 첫 64메가 D램을 개발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 개발의 주인공이 바로 권 부회장이다. 반도체의 성공을 기반으로 삼성전자는 이후 TV를 첨병으로 한 가전시장에서 가전왕국 소니를 비롯한 일본의 초우량 기업들을 줄줄이 무너뜨렸다. 여세를 몰아 지금은 미국의 애플사와 휴대폰으로 자웅을 겨루며 세계시장을 리드한다.
권 부회장의 용퇴는 재고돼야 할 이유가 있다. 그는 숨은 공신으로 표 나지 않게 일해 왔고 위기의 삼성에서 여전히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후배들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한 의지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가능하다. 좋은 명분을 내세웠지만 권 부회장의 사퇴는 수십만 삼성의 식구들을 외면하고 떠나는 식으로 비춰진다는 점도 새김질해야 한다.
권 부회장은 16M D램을 개발한 진대제 전 사장과 256M D램의 주역 황창규 전 사장보다 유명세를 타지 못했다. 반도체 교체주기가 빨라지며 시장교체 주기가 빨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위 넘사벽 일본을 한발 앞섰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 테이프를 권 부회장이 끊었다. 이후 권 부회장은 또 부가가치가 높은 시스템 반도체로 갈아타면서 이 또한 일류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는 삼성과 생사를 같이했다.
앞서 지난 1969년 창업한 삼성전자는 고작 20명의 임직원에 연매출 3700만원을 올렸고, 그 조차 700만의 적자를 냈었다. 불과 15년 뒤 삼성전자는 가전왕국 일본의 초우량기업들에 정면 도전장을 던졌고 그 값진 결실을 맺었다. 반도체는 삼성의 성공 이전에 대한민국 경제의 쾌거였다.
삼성전자는 3분기에만 매출 62조원, 영업이익 14조5000억원을 기록하면서 누적 영업이익 38조5000억원을 기록해 연간 최고치였던 지난 2013년 연간 영업이익 36조7900억원을 가볍게 넘겼다. 반도체를 기반으로 이룬 이 같은 실적을 발표한 직후 권 부회장은 사퇴 선언과 함께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는 최고실적이 자랑스럽기보다 ‘다행스럽다’고 운을 뗐다. 이어 권 부회장은 “최고실적은 과거에 이뤄진 결단과 투자의 결실일 뿐, 미래 흐름을 읽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일은 엄두도 못내고 있다”고 고백했다.
권 부회장에게 묻고 싶다. 이런 삼성의 위기를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 왜 떠나려고 하는가. 혹시 외부 압력설이 사실인가. 이재용 부회장의 단죄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음은 공지의 사실이다. 한 쪽이 무죄이면 다른 쪽을 처벌하기 곤란하거나 단죄를 해도 무겁게 하지 못한다. 더구나 ‘부정한 청탁’ 부분의 ‘묵시적 청탁’과 관련한 법리논쟁이 치열한 상황이다.
이 같은 논란의 삼성은 창업주 부자가 좌판을 깔아 소위 대박을 낸 ‘회심의 반도체’ 승부수가 지금도 진행형이다. 조부와 부친의 용단처럼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2015년 5월 평택 고덕산업단지에 세계 최대 규모의 초대형 반도체 생산라인 건설 용단을 내렸다. 그것이 지금의 사상최대 실적 신화로 피었다는 평가다. 삼성 3두마차의 한 사람인 윤부근 부문장도 그래서 총수 역할론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그는 “각 부문장들이 사업구조 재편 또는 M&A를 결정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고 말했다.
기업주는 그래서 고뇌에 찬 결단을 늘 내려야 한다. 권력싸움이 극심한 한국 정치사를 보면 기업들은 생존의 과정에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정경유착 고리에 빠지는 경우가 흔한 일이 됐다. 시쳇말로 권력의 눈 밖에 나면 그 기업은 생존 자체가 어려운 환경에 처했다. 역대 어느 정권도 기업을 상대로 위세를 부리지 않은 일이 없다. 그 이유로 대부분 권력이 비난세례를 받거나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음에도 권력의 기업 목줄죄기는 여전하다.
기업들을 강제로 동원한 박근혜 전 정권의 창조경제는 좋은 의미에도 왠지 실용성이 와 닿지 않았다. 결국 억지춘양으로 기업들이 참여했기에 사실상 실패작이다. 경제민주주의라는 말 역시 실용성은 더 의문부호다. 우리 기업들의 의사결정 과정은 현실적으로 그 기업이 크든 작든 단 1분1초도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이 아닌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권력싸움 이상으로 경제전쟁 역시 내막적으로 용서가 없다. 적폐라는 말 자체가 전 방위적으로 들이대는 정의의 잣대일 수는 있지만 적폐를 넘나들 환경에 처해 있는 우리 기업에게는 지옥에서 듣는 언어다. 병든 나무를 모두 뽑는 식으로 청소하면 대한민국엔 기업이란 말 자체가 사라질 것이라는 푸념이 그래서 나온다.
권력이 정의사회, 적폐청산 등의 깃발을 들어 올릴 때 준법과 탈법의 날선 경계에서 속된 말로 생사를 건 작두를 타는 기업들은 스스로 사지를 묶을 수밖에 없다. 이는 최악의 반시장 작동 수순이다. 그래서 시장은 권력이 최대한 작동하지 않도록 해야 성장하고 진보한다. 삼성의 단죄는 권력이 완벽히 개입한 모양새가 됐다. 아울러 권 부회장의 용퇴로 삼성은 피크 점을 찍었다는 것이 간접 확인됐다. 오르막은 천천히 오르지만 내리막길은 가히 순식간이다. 수많은 글로벌 기업사가 그랬다. 삼성의 오늘을 있게 한 인물이 최고점의 실적을 찍은 상황에서 총수 부재의 안타까움을 토로하며 떠나야 하는 이유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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