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무기력한 청년의 죄책감과 시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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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의 인문 책방…곽재구 <사평역에서>

오월 광주의 무력감과 죄책감을 보듬는 따뜻함과 아련함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7-10-22 14:57:46

최근 신인문학상 응모에 가장 흔하게 올라오는 화두는 ‘세월호’라 한다.

3년 전 3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는 현재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지우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시는 일상어에서 표현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담아내지만, 그 아름다움의 기저에는 항상 이 상처의 기억이 놓여 있다.

1980년 5·18 역시 당대 청년들의 사고에 한 축을 담당한 사건이었다. 386세대들인 이들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이 경험을 통해 채득했다. 광주에서 무고한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갈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죄책감과 무기력감. 그 죽음의 원인과 책임자를 온전히 밝혀내지 못했다는 데에서 오는 좌절감은 당대 청년들의 감성을 사로잡았다. 시인 곽재구의 문단 데뷔 역시 이 죄책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가상의 역과 불 속에 지쳐지는 죄의식

곽재구를 ‘시인’으로 데뷔시킨 작품은 그의 가장 유명한 시이기도 한 <사평역에서>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당선된 이 작품은 매우 따뜻한 감성과 시선을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5.18 당시 광주 시민으로서 군부에 아무 대응도 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자책 속에 쓰인 시라고도 한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사평역에서’ 앞부분)

시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사평역(沙平驛)은 어떤 곳일까. 한반도에 실재하지 않는 이 가상의 기차역은 한자어를 풀이하면 흥미롭다. 모래(沙)가 펼쳐진 평야(平) 위의 역. 바로 몇 개월 전 동네 주민들이 목숨을 잃는 와중에 시인은 두려움에 떨며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못한다.

대학을 다니며 남들보다 많은 지식과 높은 자의식을 갖게 된 스물일곱 살의 이 시인에게 국가의 폭력 앞에 몸을 움츠린 자신의 모습만큼 수치스러운 것은 없었을 것이다. 모래 평원의 아득함은 막차를 기다리는 이의 아득함과 공명한다. 난로를 사이에 두고 한겨울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이 모여 앉아 톱밥난로의 따스함에 의지하고 있다.

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이 기차역에 모여 앉은 이들은 부유하거나 권력을 가졌다기보다 가난하거나 어딘가에서 연락이 끊겨도 세상모르게 잊혀질 작은 존재들이다. 모래 평원의 아득한 길 앞에서 하루가 마감되는 고단함을 안고 역에 당도한 이들은 창밖의 추위를 등에 지고 서로를 감싸는 난로의 온기를 함께 응시하고 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 모두들 알고 있었다

(‘사평역에서’ 중반부)

모래 평원을 통과해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 이들의 마음은 “귀향”하는 이들의 마음처럼 누군가에 대한 미안함과 아련함으로 가득할지 모른다. 혹은 거기에는 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수치심과 죄책감이 가로놓여 있을 수도 있다.

창밖의 추위처럼 현실은 냉혹하고 엄중하며 개개의 작은 존재들이 온몸으로 뚫어내기에는 한없이 크고 두려운 무엇이다. 시인 곽재구에게 당시 자신의 처지 또한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권력 앞에 무기력했던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죄의식은 모래 평원 위에 던져진 아득한 삶만큼이나 당대 청년들에게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시인은 그 고통을 포용적인 따뜻함으로 품고 싶었던 것 같다. 냉철한 이념 논쟁이 한창이던 시대에 따뜻함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시인에게 당대의 민중들은 냉혹한 현실에 던져져 있으면서 톱밥난로를 같이 응시하는 동질감으로 함께 묶일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이 시는 이후 소설가 임철우에 의해 ‘사평역’이라는 이름의 소설도 각색되기도 한다. 모래 평원 위의 기차역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이들의 아련함은 당대를 살아가는 존재들의 번민과 아픔을 담고 있다 할 것이다.

고태경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