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탈리즘·인도주의가 이끈 근대성의 양면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전문가칼럼

정현의 인문 책방…이매뉴얼 월러스틴 <유럽적 보편주의>

유럽의 권력이 만들어낸 문명의 레토릭을 해부하다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7-12-09 17:35:52

16세기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 전쟁을 앞두고 에스파냐 두 신학자가 논쟁을 한다. 그 둘은 쎄뿔베다와 라스까사스였다. 쎄뿔베다는 ‘인디오전쟁의 정당한 명분’이라는 부제를 단 한 책자를 통해 에스파냐 정복전쟁을 옹호하는 논리를 펼쳤다.

그에 따르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미개하고 사악하며 어떤 것도 배울 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에스파냐인들에 의해 통제돼야 한다. 그들은 율법과 자연법을 어기고 우상숭배를 감행하는 사악한 종족들이다. 나아가 에스파냐 출신 가톨릭 사제들이 안전하게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도 이 야민인들은 강제로 통제돼야 한다.

반면, 쎄뿔베다의 논리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이는 라스까사스였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는 일정한 수준의 야만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 야만성 때문에 모든 존재가 야만스럽다고 간주돼서는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아메리카 인디오들은 기독교 문명의 법적 규제를 받아 왔던 이들이 아니다. 법 자체의 규제를 받지 않았는데 갑자기 기독교의 계율로 이들은 처벌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에스파냐 정복민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문명의 전파라는 레토릭은 15세기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이후 유럽의 우월성을 세계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기능했다. 비단, 15~16세기만일까? 저자 월러스틴은 단호히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오리엔탈리즘과 근대화의 규범권력

‘문명’이라는 말이 다른 문화권의 열등성을 확증 짓는 언어로 표면화된 것은 아마도 18세기 이후일 것이다. 16세기 아메리카 정복의 과정에서 종교적으로 채색되었던 권력의 레토릭은 보다 광범위한 문명 지배의 논리로 일반화되기 시작한다.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며 근대화된 유럽 대륙은 점차 자신들의 반대편에 놓인 이른바 ‘동양(Orient)’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오늘날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불리는 동양에 관한 지식의 생산이 이때부터 가속화되었다.

동양은 어떤 곳일까? 19세기 유럽인들에게 동양은 목가적이고 미개하며 진화적으로 열등한 종족들의 생활공간으로 이해되었다. 수많은 근대 유럽의 지식인들이 동양의 나라들을 여행했고, 이 여행과 조사의 기록들을 통해 제국주의적 지배의 지적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19세기는 유럽의 비유럽권에 대한 식민적 지배가 본격화된 시기였고, 동양에 관한 지식들은 동양인들에 대한 통치의 지식이 되어 그들을 탄압하는 데 활용되었다. 이때 사용된 것은 단연 근대화와 서구화라는 레토릭이었다. 혹은 발전과 진보의 레토릭이 동원되기도 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 동양의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근대화는 따라잡고 모방해야 할 세계 진화의 규범이었다. 조선 말기부터 일제 시대 한국 지식인들 역시 유사한 사고를 갖게 되었다.

유럽적 보편주의의 이중성과 인권

일종의 동의와 억압이 동시에 수반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양의 피식민국 엘리트들은 식민적 지배를 당하는 와중에도 자신들의 삶을 그 지배자의 규범을 통해 보아야 했다. ‘우리가 약탈당하는 것은 문명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대화다’ 등.

이런 근대화의 원리를 지탱한 핵심 중 하나는 단연 기독교였다. 선교 활동은 미개한 변방의 민중들을 서구적 규율로 통제하는 핵심 수단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유력한 무기가 20세기에 등장한다. 두 번의 세계대전의 파국적 과정이 끝난 후 서구의 열강들이 모여 새로운 ‘인도주의’의 길을 모색했다.

이들은 세계대전에 대한 전범재판을 감행하며, 인권의 원리를 강조했다. 그러나 전범재판을 주도한 미국의 권력가들은 세계대전 기간에도 가장 많은 이들을 학살한 이들이었다. 학살자가 학살자를 죽이는 권력의 모순적 현상들이 20세기 세계대전 이후 펼쳐졌다. 이른바 ‘인도주의적 전쟁’이라는 역설적 용어는 전후 미국을 중심으로 발명된 것이었다. 인권을 위해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 유럽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서구 문명의 보편주의 레토릭은 이 ‘인도주의’의 새로운 규범 속에서 그 야만성을 드러냈다.

고태경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