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언어 거부한 이름없는 흑인들의 해방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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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의 인문 책방…에메 세제르 <어떤 태풍>

세제르의 셰익스피어 패러디가 보여주는 탈식민주의 문학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8-01-06 13:18:03

17세기 초 영국 극작품의 대가로 등장한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중 하나가 바로 <태풍>(The Tempest, 1611)이다.

작품의 배경은 17세기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유럽인들의 식민지배 상황. 유럽 백인들은 신대륙 지배를 위해 신대륙 원주민들의 삶을 철저히 파괴하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이 작품은 백인들의 식민지배 모순을 폭로하는 듯하면서도 어딘지 모호하게 흑인 원주민들의 언어를 지워버린다는 비판을 받곤 했다.

20세기 탈식민주의 문학의 부흥은 백인 중심의 언어로 가득했던 흑인들의 왜곡된 이미지에 반기를 들며 등장했다. 그 선두에 에메 세제르의 작품 <어떤 태풍>이 있다.

유럽인의 눈으로 본 흑인 원주민들의 저항

<어떤 태풍>은 셰익스피어의 <태풍>을 패러디하며 흑인들의 목소리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이해를 위해 먼저 <태풍>의 대략적인 서사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작품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나폴리의 왕 알론소가 아프리카에서 딸의 결혼식을 진행한 후 유럽으로 돌아가는 길에 태풍을 만나는 장면이다. 풍랑에 휩쓸린 알론소 일행이 다다른 섬은 알론소에게 배신을 당했던 프로스페로의 섬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알론소에게 패한 프로스페로가 식민지배를 하고 있는 흑인들의 섬이었다. 흑인 등장인물은 이 섬의 주인이었던 시코락스와 그녀의 아들 칼리반. 프로스페로는 시코락스를 무너뜨린 후 칼리반을 자신의 노예로 삼았다.

프로스페로는 칼리반에게 백인들의 언어를 가르쳐 주었는데, 이는 원주민들에 대한 물리적 지배를 넘어 그들의 사고방식까지 온전히 지배하기 위함이었다.셰익스피어의 <태풍>에서 프로스페로 일당은 섬으로 떠내려온 알론소와 대척하면서 동시에 흑인 칼리반의 저항에 직면한다.

칼리반은 프로스페로에 의해 ‘야만인’으로 명명된다. 백인들의 눈에는 자신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흑인 원주민의 존재 그 자체가 야만적인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알론소와 프로스페로의 갈등은 화해와 용서를 통해 마무리되고 칼리반의 저항은 유럽 식민지배자들에 대한 투항을 통해 마무리된다.

투항을 하기 전 칼리반은 프로스페로 일당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당신이 가르친 언어로 내가 얻은 이득은 저주할 줄 아는 거요.” 그러나 그 저주는 백인들이 추구한 ‘용서’와 부드러운 식민지배를 통해 사라지게 된다.

세제르의 전복과 탈식민주의

세제르가 주목하는 것은 용서와 화해의 이름으로 전개된 셰익스피어 문학의 백인 중심성이었다. 칼리반에게 내려진 용서는 과연 누가 내리는 용서였는가. 칼리반은 왜 다시 프로스페로의 지배 속으로 종속돼야 하는가.

애초에 물음은 보다 근본적인 곳으로 향해야 했다. ‘칼리반’이라는 서구식 이름 자체가 백인들이 흑인 원주민에게 부여했던 이름이었다. 세제르가 주목하는 것 역시 이 부분이었다. 언어 자체가 백인중심성을 띠는 순간 흑인들의 식민해방은 근본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태풍>에서 칼리반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 역시 이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우후루”(‘자유’의 뜻을 지닌 원주민 언어)라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등장하는 칼리반은 자기 자신을 ‘칼리반’이 아니라 ‘X’로 부를 것을 요청한다.

백인들의 백인식 이름이 아닌 X. 이때 X는 백인들의 언어 그 자체에 대한 거부의 함의를 갖는다고 봐야 한다. 또는 백인들의 언어로는 의미화될 수 없는 미지의 무엇이라는 함의를 갖는다고도 볼 수 있다.

20세기 탈식민주의 문학이 주목한 주요 쟁점 중 하나가 바로 이 언어와 흑인들의 자기인식의 문제였다. 프란츠 파농이 말하는 이른바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즉 검은 피부를 가졌지만, 백인들의 주입한 언어와 이미지의 세계 속에서 오히려 스스로를 잃어버렸던 것이 흑인들의 후기 식민시대의 딜레마였던 셈이다.

세제르의 작품에서 칼리반은 자연스레 투항이 아니라 저항을 택한다. 백인들의 언어와 결별한 상태에서 식민지 흑인들의 삶이 잃을 것은 더 이상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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