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하기 마련 충동, 그렇지만 항상 반복된다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전문가칼럼

고태경의 인문 책방…자크 라캉 <자크 라캉의 세미나 11>

무의식의 문법을 찾아가는 라캉의 대표적 세미나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8-01-20 16:37:24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돼 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계승하면서도 그 근본의 핵심을 개념적으로 더 발전시킨 20세기 최고의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 아쉽게도 라캉의 저서나 세미나 강연집은 국내에 거의 번역돼 있지 않다.

20여 년 전 일부 영문학자들에 의해 극히 일부 텍스트들이 선별적으로 번역된 바 있다. 하지만 오역 논란을 낳는 영어본을 옮긴 것이었고, 번역에도 문제가 많아 매우 읽기가 힘들었다.

기본적으로 라캉의 문체 자체가 한글로 번역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 문제였다. 저술집이 <에크리>가 아직 한글번역본으로 출간되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라캉 정신분석학의 이론적 핵심으로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세미나 11권이 한글로 번역되었다는 점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정신분석 연구자들이 직접 번역한 것으로 강연 녹취록을 옮긴 것이기에 저술 텍스트보다 한결 읽기 편하다는 장점 역시 있다.

충동의 반복성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핵심 중 하나는 인간이 아버지의 질서로 편입되면서 자아(ego)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형성된 자아는 아버지의 질서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구조화돼 있다.

자아의 방어 메커니즘은 기존의 질서를 유지케 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인 성격을 지니고, 이 보수성으로 말미암아 그 질서에서 실현될 수 없는 무의식의 어떤 (억압된)잔여물을 갖게 된다.

라캉은 이 아버지의 언어로 구축된 질서를 ‘상징적인 것’(상징계)이라고 불렀다. 언어가 여러 기표들의 관계를 통해 하나의 구문과 문법을 구축하듯 무의식은 아버지의 질서를 통해 ‘구조’적으로 결정된다. 이때 언어처럼 구조화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 책에서 라캉이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충동의 ‘반복성’이다. 인간의 충동은 같은 패턴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성향을 지닌다. 술에 취할 때 왜 인간은 항상 자기만의 패턴을 반복하는 것일까. 왜 내 과거의 연인들은 항상 비슷한 무엇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보통 ‘강박’이라고도 부르는 이 반복적 특성은 크게 두 가지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무의식이 쳇바퀴처럼 닫힌 체계로 구조화돼 있다는 것이다. 쳇바퀴처럼 항상 인간은 같은 패턴의 행동을 반복한다.

다른 하나는 그 구조화된 무의식의 체계가 특정의 대상을 중심으로 반응한다는 점이다. 라캉은 이 특정한 대상을 ‘작은 대상 a’라고 불렀다.

작은 대상 a와 욕망의 불가능성

작은 대상 a는 실현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아버지의 질서로 편입되면서 억압되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질서를 상징적 질서라고 부른다면 작은 대상 a는 상징화될 수 없는 무엇, 기호로 번역되거나 말해질 수 없는 무엇이라고도 할 수 있다.

라캉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초기의 정식에서 한 발 더 나아가는 지점은 바로 여기였다. 1960년대에 진행된 이 세미나에서 라캉은 무의식이 닫힌 체계의 구조에 갇혀 있지 않다는 관점에 다다르게 된다. 그것은 완전히 닫힐 수 없는 것이고, 자신의 완결성을 영원히 구축할 수 없는 무엇이다.

내가 특정한 상대에게 강한 성적 끌림을 느끼는 것은 그 상대가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오롯이 표현할 수 없다.

내 충동이 반복적으로 같은 패턴을 취한다는 것, 그것이 온전한 만족보다는 지속적인 결핍을 수반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의 성적 끌림을 견인하는 것은 기호들로는 번역될 수 없는 작은 대상 a라는 미지의 대상이다. 그것은 언어의 구조에서는 실현될 수 없고, 따라서 충동은 그 실현의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작은 대상 a를 라캉은 ‘실재’라고도 불렀다. 기호들의 세계(아버지의 질서)가 상징적인 것이라면, 실재는 상징 불가능한 사물 그 자체다. 문제는 인간의 무의식이 이 사물 그 자체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되, 그 구조에서 온전히 번역될 수 없는 억압된 무엇을 갖고 있다.

고태경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