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후의 혼란과 세계체계론적 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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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경의 인문 책방…이매뉴얼 월러스틴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21세기의 대혼란 속에서 사회과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8-02-17 18:52:30

세계체계분석의 대표적 석학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근대세계체계>라는 미결의 역작을 저술하며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올해로 만 88세의 노학자다.

이 책은 1990년대 말 세계질서의 변동에 답하며 쓴 글들을 모아 출간한 것으로 좁게는 20세기, 넓게는 19세기 이후 세계체계의 변동과 이후 전망을 날카롭게 담고 있다.

세계체계란 무엇일까? 월러스틴이 고안한 이 개념과 연동되는 용어가 바로 ‘세계경제’와 ‘국가 간 체계’라는 것이다. 세계의 자본주의 질서는 결코 일국만의 폐쇄적 시장경제를 통해 구축될 수 없다.

<근대세계체계>에서 월러스틴은 자본주의 태동기 자체가 국가와 국가 간의 식민적 위계관계를 수반했음을 논증했다. 세계의 자본주의는 국가 간의 위계적 분업 체계를 수반하며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는 일국이 아니라 태초부터 세계경제의 형태를 띠었다는 것이다.

근대의 정치와 세계체계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태동기는 대체로 16세기로 간주되고 있다. 세계경제의 역사적 변동은 이 책 외에 월러스틴의 다른 저술들, 그리고 그의 동료인 조반니 아리기 등의 저술들을 참고하면 좋다. 이 책은 세계경제의 역사 자체보다 세계경제에 균열을 내며 등장한 근대의 정치적 역사와 그 특징들에 주목하고 있다.

근대 정치의 출발점은 18세기 말로 특히 프랑스혁명을 근본적인 패러다임 변동의 기점으로 보는 시각이 팽배하다. 월러스틴 역시 프랑스혁명 이후 나타난 변화에 주목한다. 먼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한 ‘민주주의’ 혹은 ‘민주화’의 요구들이 세계정치사에 등장했다.

월러스틴에 따르면, 프랑스혁명은 ‘인민주권’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켰다. 프랑스혁명 후 주권은 군주나 의회가 아니라 인민(people)의 것으로 선포됐고 이는 크게 두 가지의 갈래를 수반하며 19~20세기 정치사에 등장했다.

하나는 사회주의라는 이름하에 19세기 중반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본격화된 사회운동의 흐름이다. 거대한 빈부격차가 산업화되는 유럽의 도시를 가로질렀고 빈자와 약자를 완전히 다른 두 세계로 분할하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으로 알려지기도 했던 노동자 선거권 쟁취운동이 발흥했다. 노동자들의 기본권 쟁취투쟁은 주류집단들에게는 교정해야 할 사회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저항집단에게는 체제를 변화시켜야 할 도덕적-정치적 당위가 전면화된 것으로 간주됐다.

다른 하나는 20세기 세계대전을 거치며 크게 부상한 민족해방운동의 흐름이다. 간전기에는 중동부 유럽 등지에서 전후에는 아프리카, 인도 및 지구의 남반구에서 민족해방운동의 흐름은 거대한 정치적 힘을 수반하며 전개됐다. 특히 전후에 부흥한 후자의 경우, 민족해방의 과제는 동시에 서구적 근대화를 따라가는 경제개발의 과정을 수반하기도 했다.

위기에 빠진 세계체계와 혼란의 21세기

이 두 가지 정치격변의 흐름들은 그러나 20세기 중후반을 경과하며 상당히 잠잠해진다. 1989년은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을 수반했고 1980년대 이후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해 북반구의 기존 개발도상국들이 경제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이 몰락은 비단 이들만의 몫은 아니었다. 자본주의 경제가 근본적으로 세계의 국가 간 네트워크 체계를 구성하고 있듯, 197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 불황은 일부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전 지구적 동요를 수반하는 것이었다. 80년~90년대 라틴아메리카 및 동북아 경제위기는 글로벌 경제위기의 불안감을 증폭시켰고 90년대 말 신경제의 깜짝 부흥 이후 미국 역시 2008년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경험한다.

전후 경제호황을 바탕으로 들어선 세계경제는 기본적으로 미국 헤게모니 중심이었다. 이 헤게모니하에서 선진국들은 경제 부흥을 향유했고 개발도상국들은 서구의 선진국들을 모방하며 경제개발의 드라이브를 건다.

그리고 냉전의 양극단 속에서 미국 자유주의와 동구권 사회주의의 공생관계가 시작됐다. 이 시대의 체제유지를 가능케 한 것은 다음과 같은 믿음이었다. ‘역사는 진보하며, 이후 세대들에게는 더 나은 미래가 주어질 것이다.

따라서 20세기 후반 이후 지속되는 경제위기와 체제동요의 움직임은 이 믿음의 역전 속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제 누구도 미래가 더 나아질 거라 믿지 않는다. 지난 수십 년간 세계경제는 일정한 정체기를 경험했다.

21세기의 서막을 연 거대한 동요의 흐름들은 이러한 실망과 낙담 속에서 퍼져나가고 있다. 20여 년 전 월러스틴이 한 예견은 2018년의 우리에게 너무나 적확하게 와 닿는다. 전 지구적으로 포퓰리즘의 부흥과 경제불황이 심화되는 오늘날 우리는 아직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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