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미국에 배은망덕한 한국인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데스크칼럼

광해군, 미국에 배은망덕한 한국인

스카이데일리 칼럼

김진강 산업경제부장·부국장 기자페이지 + 입력 2018-03-02 09:53:40

조선 15대 왕 광해군은 전통적 우방 명(明)나라와 신흥세력 후금(후에 청나라)이 교체되는 국제정세 속에서 발군의 외교력으로 나라의 안전을 지켜낸 인물이다.

‘중립외교’ 카드를 통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후금과의 전쟁을 피했고,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재건해 나갔다.

국익을 최우선하는 실용적인 외교를 펼친 광해군은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긴 현명한 군주로 역사는 기록되고 있다.

반면 광해군과 정적관계인 서인(西人)세력은 명나라에게 사대의 예를 다하지 않는 광해군을 ‘명나라의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왕’으로 여겼고 종국에는 쿠테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쫓아냈다.

서인은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뿌리로 둔 사림파의 한 분파다. 학문적으로는 성리학을, 외교노선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근본으로 삼았다. 선조 때에 정계의 실권을 장악했지만 광해군 시대에는 갈등관계를 유지했다.

이병헌이 출연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보면 명나라 바치는 조공물이 지나치게 과하다는 광해군의 지적에 대해 한 신하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나라가 있는 것이 누구의 덕이옵니까. 명이 있어야 조선이 있는 법, 오랑캐와 싸우다가 짓밟히는 한이 있더라도 사대의 예를 다 하는 게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당시 서인세력의 외교관과 국정철학을 정확히 보여준 말이다.

서인세력은 ‘자신들의 왕은 명나라 황제 뿐’ 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의 왕은 명 황제를 섬기는 조선 사대부들을 대표하는 인물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명 황제의 신하에 불과한 광해군이 명나라에 불충한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인조반정’이라는 쿠테타는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 것이다.

권력을 장악한 서인세력은 국제정세에는 아랑곳 않고, 그들의 노선대로 명나라에 대한 사대외교와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펴 나갔고, 그 결과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이라는 대 참극과 치욕적인 삼전도의 굴욕을 불러왔다.

나라의 이익과 백성들의 생존을 우선시 했던 광해군과 국익보다는 명 황제에 대한 맹목적인 사대의 예가 중요했던 서인세력간의 권력투쟁에서 서인세력은 승리했고, 이를 두고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조선왕조의 몰락을 가져온 첫 징조로 보고 있다.

400여년이 지난 우리사회에는 아직도 서인세력의 그림자가 짙게 베여 있다. 국익과 국민의 생존보다는 ‘미국을 섬기는 것이 우선’이라는 목소리가 ‘애국’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횡횡하고 있다. 미국과 벌이는 경제전쟁에서 조차 우리의 이익보다는 미국의 심기를 건드릴까 노심초사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지난달 미국이 우리나라 철강 수출 품목에 대해 53%의 고 관세를 부과할 것으로 알려지자, 자유한국당을 포함한 자칭 보수세력들은 일제히 ‘미국의 심기를 건드린 결과 빚어진 외교참사’라며 들고 일어났다.

장제원 대변인은 “미국과는 매 고비마다 엇박자를 내는 탈동맹적 외교 정책이, 급기야 미국으로 하여금 우리를 경제 동맹에서 이름을 지우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며 정부를 성토했다. ‘현 정부의 잘못으로 인해 미국이 우리나라를 버리려한다. 미국에게 빌어야한다’는 투다.

하지만 최근 미국 언론들이 ‘트럼프가 철강 관세를 한국만이 아니라 모든 국가를 대상으로 관세 24%를 일률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고 보도하자 일제히 침묵모드로 돌아섰다. ‘53%의 관세 부과案’은 미 상무부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출한 여러 방안 중 하나일 뿐이었고, 한국만을 타깃으로 한 것도 아니었다.

평창동계올림픽 기간 동안 이뤄진 북한 고위급인사들의 방남에 대해 ‘결사반대’를 외치며 길거리에 드러눕는 퍼포먼스를 벌였지만, ‘북한 인사의 방남은 미국과 협의해 이뤄진 것’으로 보도되자 슬쩍 발을 뺏다.

‘전시통제작전권’을 한국에 넘기겠다는 미국에 대해 ‘뜻을 거두어 달라’며 읍소하는가 하면, ‘정부의 대북정책이 위험하니 도와달라’며 미국으로 달려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태극기 부대’로 불리는 극우집단들이 벌이는 ‘박근혜 석방, 문재인 퇴진’ 시위에는 어김없이 성조기가 물결을 이룬다. 미국 정책에 반(反)하거나 미국의 요구사항을 수용하지 않은 것 자체를 ‘불경’으로 간주한다. 한마디로 배은망덕한 행위로 보는 것이다.

‘북한과 대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미국의 은혜를 모르는 배신자 집단’으로 매도된다. 53%의 무역관세를 매기겠다는 미국에 대해 전략적인 대응책 마련에 나서기 보다는 ‘감히 미국에게 대든 우리의 잘못이 크니 이를 수용해서라도 미국의 불편한 점을 풀어드려야 한다’고 여기는 현대판 서인세력들의 그림자가 사회 곳곳에 드리워져 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는 가짜 광해의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그대들이(서인세력)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 갑절, 백 갑절 더 소중하오. 내 그들을 살려야 겠소”

국익과 긍지,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못한 사대주의는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다. 한국과 미국은 동등한 관계에서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길은 힘을 합치고, 다른 의견이 발생하면 조율과 이해를 해 나가는 관계다. 동맹과 사대주의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김진강 기자 / 행동이 빠른 신문 ⓒ스카이데일리]

김진강 산업경제부장·부국장 kjk5608@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