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자본주의가 빚어낸 역사적 공동체,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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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경의 인문 책방…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언어의 가능성이 만들어 낸 민족주의와 이를 이끈 인쇄매체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8-03-04 12:17:21

두 번의 세계대전을 돌아보며 베네딕트 앤더슨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갖는다. 왜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국을 위해 그렇게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자 한 것일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유한한 존재다.

그는 일정한 수명을 다하면 생물학적으로 소멸하게 돼 있고 오직 제한된 공간에서만 온전히 거주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유한성에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한 것은 무엇보다도 언어였다. 근대의 민족주의는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 위에서 탄생했다.

인쇄매체의 발명이 결정적 계기였다. 근대 자본주의에서 거의 최초의 대량생산물은 책이었다. 사람들은 신문과 소설과 잡지 등을 통해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도 하나의 공동체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편지는 특정의 수신자와 발신자를 갖지만 소설과 신문은 익명의 대중들 그 자체를 하나의 상상세계 속으로 묶어내는 힘을 갖고 있다.

어느 날 신문에 뜬 전쟁 소식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공포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타국의 침략에 맞서야 한다는 거대한 민족적 공동체 감각을 수반하기도 했다.

언어와 민족주의의 종교적 힘

이러한 공동체 감각은 근대의 다른 이념들과 달리 민족주의에 고유한 관념이었다. 근대의 정치사상을 특징짓는 다른 이념들을 돌아보도록 하자. 우리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소중히 하고 공화주의를 프랑스혁명의 정치적 모토로 간주하곤 한다. 그러나 어느 이념도 그 자체로 민족주의만큼 거대한 희생을 수반하지는 않았다.

세계대전은 각 국가들의 거대한 민족주의적 감성에 기반 해 폭발했다. 민족주의적 열정에 원천은 어떤 영원성에 대한 열망에 있는 듯하다. 앤더슨은 프랑스의 지식인 레지 드브레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내가 프랑스인으로 태어난 것은 완전히 우연적인 것이다. 하지만 결국 프랑스는 영원하다. 나의 생물학적 태생은 부모의 성적 접촉이 나은 순전히 우연적 산물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수많은 이들의 역사가 축적된 채로 형성된 민족적 정체성은 개별의 유한한 생명을 초월한 존재가치를 갖는다”

과거에는 여러 제국들이 존재했다. 중화제국, 오스만제국, 로마제국 등이 존재했고, 이들은 신적인 권위를 갖는 황제의 이름하에 지배됐다. 한자와 라틴어 등은 대중들이 사용할 수 없는 신성한 문자였고, 종교는 세속의 민중들에게 고통을 감내하도록 하는 정신적 원천이 됐다.

반면, 제국의 붕괴는 영원한 진리로 간주되던 권위(황제)와 가치(종교)를 붕괴시켰다. 근대의 국민국가들은 이 권위와 가치를 대체할 새로운 척도들을 발견해야 했다. 그리고 여기서 나타난 것이 민족주의의 마법이다. 민족주의는 영원성과 종교적 진리가 붕괴한 자리에 나타나 유한성을 새로운 유형의 영원성으로 대체해야 했다.

드브레의 말을 빌리면, 나의 태생은 순전히 우연적이고 생물학적으로 유한하지만 나의 조국은 영원해야 한다.

인쇄자본주의와 민족주의의 숙명성

우리말의 ‘민족주의’로 번역된 영어는 'Nationalism'이다. 이때 Nation은 라틴어 어원상 ‘태어남’, 즉 ‘출생’을 그 원천으로 한다. 민족주의의 구성원 자격은 자연적으로 주어진다. 출생은 그 자체로 자연적이며 우연적인 무엇이다.

그러나 이 출생의 소속감은 근대 국민국가의 체계 속에서 새로운 힘을 발휘한다. 근대의 민족주의는 프랑스혁명의 여파 속에서 대중의 혁명적 역동성을 수반했다. 20세기에 이르며 민족주의는 국가의 위로부터의 통제 하에 (제3세계 및 개발도상국들을 중심으로)국가발전의 정신적으로 원천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새마을운동이 그러했고 일제 강점기의 민족해방운동이 그러했듯, 민족주의는 분명히 개인의 유한성을 넘어서는 강력한 힘을 수반했다. 이렇게 민족주의 속에서 유한한 존재는 무한한 힘을, 우연적 존재는 의미를 갖는 필연의 존재로 격상한다.

이것은 근대 민족주의 특유의 마법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에 공동체라는 것은 좁은 지역에서 면(面) 대 면으로 형성된 비좁은 부락조직 등을 의미했다. 이러한 전근대적 부락들은 면대면의 물리적 관계에 완전히 구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달랐다. 민족은 물리적 구속을 벗어나 국경이라는 거대한 지평을 그 외연으로 하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서울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이 올림픽에 열광하고 외세에 맞서 공분하는 것은 이들의 관계를 매개하는 무엇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앤더슨은 그것을 근대 인쇄매체에서 발견한다.

신문과 잡지와 소설 등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은 정보와 읽는 즐거움만이 아니었다. 익명의 수많은 유한한 존재들을 하나의 숙명적인 상상의 공동체로 묶어내는 거대한 힘이 등장했다. 인쇄자본주의의 역사적 소명은 거기에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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