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시대, 정치를 위한 신학적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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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경의 인문 책방…사이먼 크리츨리 <믿음 없는 믿음의 정치>

인민 결합으로 만들어진 사회와 구원의 열망에 기초한 정치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8-03-10 23:22:30

근대 정치철학의 기초를 놓았다고 평가받는 루소의 대표작 중 하나는 ‘사회계약론’이다. 그 책에서 루소는 ‘인민(민중)이 인민일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말을 던진다.

사회는 수많은 인민들의 결합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거리에 흩어져 있는 익명의 사람들 자체가 루소가 말하는 의미의 ‘인민’은 아니다. 인민은 정치적 주권자를 말한다. 대한민국의 헌법 1조에 실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에서 ‘국민’은 곧 루소가 말하는 ‘인민’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너무나 당연하게 이해되는 이 말은 많은 딜레마와 혼란을 동시에 수반한다. 언제부터 우리는 국민 혹은 인민이 되는 것일까. 신생아일 때부터일까, 아동기를 끝내고 난 뒤부터일까. 치매가 있거나 여타의 장애가 있을 때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국민이 곧 주권자라고 할 때 투표권은 왜 국민들 중에서도 만 19세 이상에게만 부여되는 것일까.

루소의 용어를 빌려 이렇게 다시 물을 수 있다. 인민이 주권자로서 인민이 되는 것은 언제부터일까? 혹은 어떤 방법을 통해 살과 피를 갖는 개별의 사람들이 주권자의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일까? 인간이 그 자체로 주권자적 능력을 갖추지 않는다면 인간을 인민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주권자가 탄생하는 신학적 계기

무엇보다 인간이 그 자체로 주권자의 자격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사회에서 교육과 훈육을 통해 일정한 표준적 국민의 모델을 창조하는 것 역시 이러한 맥락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때문에 ‘사회계약론’의 위 물음은 순환논법적 딜레마를 수반한다. 사회는 인민들의 결합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역으로 사회의 노력 없이 그 자체로 인민이 먼저 존재할 수도 없다.

여기서 크리츨리는 어떤 ‘픽션’의 작용에 대해 말한다. 개별 인간들은 특정한 계기들, 예컨대 프랑스혁명 등과 같은 거대한 변화의 순간에 자신들을 결혹시키는 새로운 정치체의 탄생을 가정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제헌행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근대적 의미의 국민국가가 없을 때 헌법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반면 사람들은 구 체체의 몰락과 더불어 헌법의 창조행위를 통해 본인들을 완전히 다른 존재, 즉 주권자로 상상하기 시작한다.

종교가 신학적 구원의 가능성을 상상하듯 정치는 정치적 패러다임 변화의 지평을 상상하면서 시작한다.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라는 선언 행위를 통해 프랑스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새로운 주권자, 즉 인민으로 가정하기 시작했다.

선언의 행위는 일종의 신학적 정초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헌법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의 제헌행위는 (마치 달에 착륙해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듯) 불모지에 새로운 세계를 확립하는 행위 근본적 단절이다. 이것이 신학적 원리와 유사한 점에 주목해 보자. 종교란 무엇인가. 그것은 구원의 가능성을 가정하고 신의 존재를 믿으며 시작된다. 믿음의 행위가 없으면 종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제헌의 행위 역시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주체(인민)가 이미 이 땅에 도래했다고 상상하지 않는 순간 애초에 시작될 수 없다. 사회는 이미 인민이 와 있다고 가정할 때 인민은 자신들이 이미 사회 속에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에만 상호 존속할 수 있다. 메시아의 재림 속에 새로운 세계가 열리듯 정치적 혁명의 순간은 새로운 법적 문법과 주체가 이미 도래했음을 알리는 순간이다.

위기의 공동체에 가닿는 편지

그렇다면 정치의 이러한 신학적 계기는 언제 오는 것일까. 평온한 일상에서 프랑스혁명과 같은 대격변은 오지 않을 것이다. 크리츨리는 바울의 <로마서>에 집중한다. 로마인들에게 바울은 편지를 보내고, 이 로마인의 공동체에 위기가 왔음을 알리며 구원의 열망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저자의 ‘복음’에 대한 해석이 흥미롭다. 그는 신의 소식(to euaggelion)을 의미하는 ‘복음’이 어원적으로 “‘선포하다’ 혹은 ‘고지하다’(euaggeliomai)”의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신학적 전파의 행위는 새로운 세계가 열렸음을 ‘선포’하는 행위이며 이는 메시아가 우리 앞에 왔다는 구원의 알림이기도 하다.

이 알림이 가닿는 곳은 ‘위기의 공동체’다. 편지란 무엇인가. 익명의 독자군을 갖는 출판물들과 달리 편지는 특정의 수신자와 발신자를 갖는다. 편지는 발신자의 메시지가 수신자에게 온전히 가닿아 그들에게 어떤 울림을 줄 때 과제를 완수하게 된다. 바울은 메시아를 대리해 로마인들에게 위기의 상황과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 말하며, 그들의 결단을 요구한다.

오늘날 정치 역시 동일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 누가 바울이 돼 로마인들처럼 위기에 직면한 이 세계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던질 것인가. 이 메시지는 수신자들로 하여금 신학적인 거대한 결단을 요구한다. 메시아가 거대한 해일을 일으키며 등장하듯, 정치적 파장은 불가역적인 힘을 수반하며 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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