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문화사를 통해 보는 프랑스혁명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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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경의 인문책방…로제 샤르티에 <프랑스혁명의 문화적 기원>

인쇄매체의 보급과 대중 감수성의 변화는 어떻게 체제를 변화시켰는가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8-04-14 17:20:29

역사를 접근하는 여러 방법들이 존재한다. 우선 왕조별, 정치체제별에 따른 역사서술이 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왕조의 시대가 있었고 일제 식민지기를 거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다.

지배층의 변화에만 주목하는 이러한 관점은 역사학의 성장 속에 상당한 비판에 직면한다. 이후 경제적 구조의 변화에 주목하는 새로운 역사서술 방식이 주목을 끌었다. 주되게는 ‘사회사’고 통칭된 이러한 기류는 일부 지배층을 넘어 시대의 일정한 구조에 주목했다는 점에 큰 시사점이 있었다.

그 구조는 주로 경제적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20세기의 기라성 같은 역사학자들이 자본주의의 역사를 경제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적하며 서술해 나갔다. 샤르티에의 <프랑스혁명의 문화적 기원>은 이러한 두 주류 역사학의 관점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성장했다.

문화사 혹은 신문화사라는 이름으로 불린 이 기류는 경제나 정치라는 거시적 구조를 넘어 민중의 일상문화에 주목하며 등장했다. 프랑스혁명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정치사라면 왕조의 권력문제에, 경제사라면 절대군주제하의 경제정책 및 계급관계 등에 주목했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샤르티에가 주로 주목하는 것은 바로 독서의 역할이다. 18세기 계몽사상은 정치나 경제적 변동을 넘어 인쇄문화의 성장 속에 이해될 수밖에 없다. 비단 계몽사상가 등의 지식인층뿐 아니라 기층 민중들의 독서생활 역시 당대의 문화적 감수성을 크게 변형시켰다. 독자층을 뜻하는 ‘공중’(pubic)이, 그리고 그들의 ‘여론’(public opinion)이 시대변화의 강한 울림을 주며 공론장에 나타났다.

독서와 추상적 사고의 등장

인쇄매체의 부흥이 낳은 가장 큰 효과는 무엇일까. 대체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적 사고를 견인한 핵심 요소로 ‘문자’의 활용을 드는 이들이 있다. 일상의 생활세계는 ‘보편’의 추상적 언어를 알지 못한다. 예컨대, 나를 둘러싼 친구들, 가족들, 직장선후배 관계들, 연인들은 보편적 담론이 아니라 친밀성이나 위계를 통해 나와 맺어진 이들이다.

친구가 나를 부를 때 그들은 나의 이름을 부르거나 ‘너’라는 2인칭 대명사를 활용한다. 여기에는 민중, 인류, 계급, 젠더 등과 같은 추상적 담론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군주를 대할 때, 어떠한 신하도 그 군주를 왜 군주로 대해야 하는지 묻지 않는다.

반대로 독서는 개인들을 생활세계가 가닿지 않는 새로운 추상의 영역으로 인도했다. 독서는 파편화된 개인들을 상상의 세계 속에서 하나로 묶는 기능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독서를 통해 형성된 18세기의 사고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모든 것은 우주의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자연법칙처럼 모든 것은 동등하다’

따라서 시장의 상품교환에 대한 국가의 과도한 개입은 시장의 자연법칙을 위배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너와 나, 주인과 노예, 군주와 신하의 관계를 넘어 ‘인류’라는 추상적 실체가 상상되면서 모든 억압은 부당한 것으로 규탄됐다.

공중의 등장과 프랑스혁명의 문화

따라서 프랑스혁명의 기원이 된 18세기의 시대정신에서 인쇄매체의 부흥을 빼놓을 수 없다. 당대를 묘사하는 가장 상징적인 표현 중 하나가 ‘문필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이라는 말이었다. 요컨대, 세계는 크게 세 가지의 구도로 나뉘었다고 볼 수 있다.

절대군주제하의 지배관료층, 민중들의 생활세계, 그리고 독서를 통해 생활세계로부터 추상화돼 형성된 문학적 상상력의 세계(문필공화국). 18세기의 신문들은 소설들을 연재했고, 민중들은 직간접적으로 신문이나 책들을 접하게 됐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수많은 개인들이 텍스트의 세계를 통해 하나의 여론집단을 형성했다. 당대의 이 독자군을 지칭하는 흥미로운 용어가 바로 ‘공중’(public)이었다. 공중은 독서를 통해 교양을 획득하고, 공론장의 여론을 형성해갔다. 그 여론을 통해 절대군주의 권위가 기각됐다.

군주의 권위는 공중의 상상 속에 형성된 ‘인류’의 개념으로 대체됐다. 군주에게는 없는 절대적 평등과 보편적 우애의 사고가 이 인류의 추상적 개념으로부터 나타났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시대사적 딜레마가 등장했다. 어디서부터 민중은 공중이 되는 것일까.

당대 지식인들은 이 딜레마에 빠졌다. 이들에게 공중의 반댓말은 민중이다. 공중이 주체적이고 교양을 갖춘 여론의 주도층이라면, 민중은 어리석고 변덕스러우며 욕망에만 충실한 무형질의 무리군이다.

물론 현실에서 이 둘의 경계는 모호하다. 민중은 곧 공중이기도 하며, 그 역시도 사실이다. 프랑스혁명은 다수 민중의 힘으로 공중의 지혜를 선포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라는 기념비적 텍스트는 18세기 문필공화국의 상상력 속에 쓰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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