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사회과학이 망각한 실천적 지혜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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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경의 인문책방…위르겐 하버마스 <이론과 실천>

관리의 기술이 된 현대의 정치와 기술공학적 덕의 추구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8-04-28 17:57:46

고대 그리스에서 정치와 도덕은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됐다. 요컨대 정치는 도덕적 완성을 위한 행위였던 셈이다. 정치의 어원이 된 폴리스는 도덕의 실현 공간이었다. 폴리스의 목적이 덕의 완성이라는 바가 함의하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날 정치는 도덕 그 자체와는 분리된 영역을 표방하고 있는 듯하다. 많은 이들의 관심사는 다음과 같다. 정치를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국면에서 각 국의 정상들이 원하는 내밀한 도덕적 가치는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정치의 목적 자체보다 정치의 방법과 그 결과에 더 많은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확실한 것은 정치에 대한 관심에서 도덕적 가치 이상으로 정치적 ‘공학’이 더 많은 관심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고대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매우 현대적인 현상이다.

고대 그리스의 실천지혜와 그 변화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현대의 정치공학적 사고를 고대 그리스의 철학적 사고와 대조시킨다. 고대 그리스에서 정치와 도덕을 한 데 잇는 핵심 개념은 바로 프로네시스(phronesis)라는 개념이었다. 한국말로 ‘실천지혜’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이 개념은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적 인식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덕의 추구를 위한 실천적 사고를 지칭한다.

모든 인간은 주어진 상황에서 더 나은, 어떤 삶의 가능태를 향해 나아간다. 실천지혜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이 가능태를 향해 나아가는 도덕적 지혜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선한 삶 혹은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교육적이면서 동시에 윤리적 성격을 띠었다.

반면, 현대에 와서 이 실천지혜는 거대한 의미상의 변화를 겪게 된다. 우선 도덕은 기본적으로 양심의 내면적 행위로 좌천됐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은 식민지에 억압된 지식인의 양심을 표방할 뿐 그 자체로 정치적 각성이나 행위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이 양심고백은 내밀한 관계들을 통해 소통될 뿐 그 자체로 공적인 집단행동과 선언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도덕이 양심의 문제가 되면서 역으로 법질서는 양심의 영역과 분리된 기술공학적 판단의 문제가 됐다. 예컨대 하버마스는 이렇게 말한다.

“현대에 와서 더 이상 인간 존재의 타인에 대한 실천지혜적 행위는 요구되지 않았다. 오히려 요구된 것은 규칙, 관계 그리고 제도의 정확히 계산된 발생이었다”

실천지혜적 행위란, 덕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를 뜻한다. 이제 세계는 덕 자체의 추구보다 질서의 유지와 관리라는 기술공학적 물음에 봉착한다. 통계학은 인구의 수를 측정하고 그들의 관리를 표방하며(출산율 등) 경찰학은 사회의 동요를 다스리는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경제학은 금리와 임금과 환율 등의 관계를 조정하고자 하는데 여기서 관건은 도덕적 가치 자체가 아니라 질서의 유지와 관리라는 데 있다.

정치는 가능태를 찾아가는 것

인간에게 있어서 덕이란 많은 경우 아직 실현되지 않은 상태로 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에서 정치란 곧 실현되지 않은 것을 찾아가는 과정상의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정치는 자체의 목적이 있으며(덕의 실현) 주어진 상황에서 이 목적의 실현을 위해 나아갈 방향을 탐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반면, 근대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정치는 일종이 관리의 행위로 전환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에 나타난 자연과학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자연과학이 나와 분리된 세계(어떤 대상 혹은 우주)를 ‘측정’하고 ‘관찰’하고자 한다면 이제 우리는 관찰자의 안목으로 사회의 혼란을 측정하고, 경제적 동요와 갈등을 조정하고자 한다.

자연과학은 우주만물에서 자연적인 운동의 법칙들을 발견했다. 현대의 모든 학문적 사고에서 핵심이 된 것은 이 법칙, 즉 ‘메커니즘’이라는 개념이었다. 예컨대 경제학은 이윤율의 작동 메커니즘을 발견한다. 인구학은 출산율의 증감에 대한 일련의 메커니즘이 있음에 주목하고 심리학은 나이에 따라 혹은 성별에 따라 인간의 자아가 성장해 가는 법칙이 있음을 발견한다.

이 법칙들에 밝은이들을 우리는 전문가라고 부른다. 혹은 기술자 혹은 테크니션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러한 테크닉들이 총집합된 것이 현대 경영학일 것이다. 기업을 관리하고 사회를 통치하며 나아가 자아를 경영하는 테크닉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경영학 너머의 도덕적 가치들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시인의 양심고백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공적 행위에서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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