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만들어내는 문명과 문화의 계보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전문가칼럼

고태경의 인문 책방…니시카와 나가오 <국민이라는 괴물>

서구 제국주의 산물로 탄생한 ‘문명’과 갈등적 관계로 태동한 ‘문화’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8-05-26 16:20:22

문명(civilization)이라는 개념은 언제 등장한 것일까? 현대적 의미의 문명 개념이 등장한 것은 18세기 후반으로 알려져 있다. 대체로 프랑스, 영국 등을 중심으로 확산됐고, 단어를 분철하면 시민(civil)을 만들어낸다(-ization)라고도 풀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개념에 상응해 등장한 또 다른 개념이 바로 문화(culture)였다. 흥미롭게도 문화는 프랑스의 인접국이자 상호갈등 관계를 놓인 독일을 중심으로 확산됐다. 문명이 이후 미국 등의 서구 제국주의 국가에서 자주 활용됐다면, 문화는 일본 등의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더 강렬한 호응을 끌어낸 단어가 된다.

요컨대 문명과 문화는 역사적으로 매우 갈등적 관계에서 태동한 개념들이다. ‘국민’(nation) 형성의 의미를 추적하는 이 책은 먼저 이 두 개념의 함의를 묻는다.

문명 개념의 기원

먼저 이 단어들의 기원에 주목해 보자. 문명과 문화의 현대적 의미는 모두 18세기 후반에 형성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18세기면 프랑스에서는 혁명 전의 앙시앵레짐기였다. 이 시기에 문명 개념이 함의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문명은 고대 도시국가의 시민에 연결된 말이고…현재의 역사학 용어로 말하면 소시어빌리티(sociability)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기 떄문에 도시생활을 모델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8세기 도시의 존재는 절대군주와 대립되는 시민적 감성이 싹트던 공간이었다. 출판물의 부흥은 당대 도시에서 군주의 언어와는 분리된 ‘여론’이라는 것을 등장시키게 된다. 연재소설이 크게 흥행하고 다양한 형태의 정기간행물들이 만들어지며 공론장이라는 새로운 시민적 소통 모델을 창출한다.

한편, 농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지역경제에서 도시는 역사의 ‘진보’가 진행된다는 근대의 새로운 관념을 파생시키기도 했다. 프랑스와 영국 등은 18세기 자본주의 발전에 중심이 된 나라들이었다. 문명은 진보의 표상이자 산업화가 일찍 진행된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우월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프랑스에서는 체제전환의 정치적 대혁명이 발생하며 이러한 진보의 관념을 더욱 확고히 했다. 문명은 신분의 차별 없이 모두가 시민이 되는 세계이며 경제적으로 번영한 선진국 문물을 그 대표체로 하는 개념이었다.

문화 개념의 민족주의적 저항

이러한 우월감은 반대로 후발자본주의 국가들의 새로운 정서와 관념을 불러일으킨다. 가장 선두에 선 곳은 독일이었다. 프랑스 및 영국의 물질적 번영에 대적할 독일적 정신의 가치는 무엇인가, 인류의 보편적 진보에 대적할 우리만의 고유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이때 나타났다.

문화는 문명의 대립항으로 등장했다. 후자는 어떤 보편성을 상징했다. 도시의 성장과 경제적 번영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됐다. 그 불가피함은 물론 완전히 서구적 모델을 따르는 방식이었으나, 서구의 절대적 권력은 그들의 특수성을 보편적 이미지로 각색하기에 충분했다.

반대로 철학과 미학, 그리고 정신적 가치를 강조한 독일, 제국주의 열강들에 도전한 섬나라 일본은 모두 자기 민족만의 세계를 강조하기 시작한다. 문화는 문명의 보편성에 대립하는 개별 민족만의 고유성을 표상했다. 이 대립에서 알 수 있듯 사실상 이 두 개념은 근대의 민족주의 혹은 국민주의의 태동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수백만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 독일과 동아시아 패권을 위해 식민지배를 일삼은 일본은 사실상 영국, 프랑스, 미국 등과 함께 20세기의 세계대전을 추동하게 된다. 저자는 이 모든 과정이 궁극적으로 국민국가의 자기정당화를 위해 활용됐다는 점에 주목한다. 일종의 ‘국민주의’라는 괴물이 등장했다. 이 괴물은 문명과 문화 개념의 대립쌍을 활용하며 근대 역사의 국가 간 갈등을 수반한다.

고태경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