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으로 불러오는 그날…1987년 시위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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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경의 인문 책방…영화 <1987>과 김원의 <87년 6월 항쟁>

민주화의 집단기억과 2018년이 연희를 기억하는 법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8-06-05 16:50:18

연초에 영화 <1987>을 보다가 여기저기서 눈물을 훌쩍이는 소리를 듣게 됐다. 영화의 후반부 이한열이 연세대의 정문을 향해 구호를 외치며 나아갈 때, 주인공 연희가 시위대의 한복판에서 버스 위로 올라가 구호에 동참할 때 감정은 절정에 이른다.

영화관에 있던 사람들 중 다수는 그 시위 현장에 있지 않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이 눈물을 함께 흘리는 것이 그들의 뛰어난 공감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지지도 않는다. 내 생각에 1987년에는 어떤 불가역적인 ‘집단 기억’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했는가는 부차적인 문제이고, 그 사건의 상징성을 다수가 자연스럽게 자기 경험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연희’라는 캐릭터에 대한 상상적 집단기억

과거를 재현하는 방법은 다양할 것이다. 영화는 연희라는 상상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고인이 된 실제인물 이한열을 등장시키며 시대의 한복판으로 다가간다. 리얼리티(이한열의 죽음)는 상상의 서사(연희의 깨달음)를 만나며 관객들의 거대한 공감을 이끌어낸다. 상상 속 인물 ‘연희’는 어떤 존재일까. 관객들은 연희의 내면갈등을 통해서 무엇을 보고자 한 것일까.

‘이한열’은 80년대 말 대학 운동권의 상징적 인물이다. 민주화라는 말의 다른 이름은 독재에 대한 저항이고, 이한열은 군부독재의 희생양으로 87년의 대폭발을 낳은 인물로 기억된다. 영화 속에서 이한열은 연희를 학생운동에 동참시키고 싶어 하며 거리에서 시위를 선동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반대로 ‘연희’는 운동권과 거리를 둔 스무 살 대학생으로 등장한다. 연희의 내면갈등을 간략히 복기해 보자. 먼저 연희는 체불임금에 맞서 투쟁하다 목숨을 잃은 아버지의 기억을 갖고 있다. 연희는 가족사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었고, 이로 인해 시위대가 불러오는 고통의 기억과 직면하지 않고 싶어 했다.

그러던 연희가 대학 입학과 함께 만화사랑 동아리에 가입하고 그곳에서 이한열을 만난다. 연희의 내면갈등은 가족사의 개인적 고통으로부터 시위대의 집단 경험으로 확장됐다. 이한열의 죽음은 대공분실에 잡혀간 외삼촌의 모습과 겹쳐지며, 아버지의 죽음을 개인사가 아니라 시대사적 의미로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요컨대, 시대는 무고한 이들의 죽음을 불러오는 독재의 세계였고 이것이 연희의 시위 참여를 결정케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87년의 집단기억과 중산층 의식

한편, 김원의 ‘87년 6월 항쟁’은 소설적 상상력을 가미해 87년 투쟁의 흐름과 분열의 과정을 추측한 흥미로운 책이다. 이번에는 이 책을 통해 87년 투쟁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를 복기해 보자.

먼저 시위의 도화선이 된 고 박종철, 고 이한열이 있다. 이들은 독재의 희생양과 같은 상징적 인물로 회자됐고 시위대는 이들의 죽음을 집단적 일체적 경험으로 받아 안으며 분노한다. 다른 한편에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로 대표되는 이른바 ‘순수시민’의 시위대 참여가 존재한다.

당대에 ‘노동자’라는 개념은 ‘블루칼라’ 이미지를 불러오는 것이었다. 화이트칼라는 준-엘리트층의 시민들로 간주되는 경향이 강했다. 전자는 미디어를 통해 보통 과격파의 이미지로 소환됐고 후자는 국가의 선진화를 상징하는 온건파 순수시민의 이미지로 표상됐다. 김원에 따르면 실제로 시위의 진행과정에서 6월 말 이후 이 두 계층은 서로 분화됐다. 후자는 대열 이탈을, 전자는 7~9월로 이어지는 노동자 대투쟁으로 대열을 전화해 나간다.

그리고 이후 87년의 투쟁은 주로 화이트칼라층의 이미지를 통해 기억됏다. 그 기억의 핵심에 놓인 것은 과격파와는 거리를 둔 ‘순수시민’의 이미지였다. 이 이미지는 이후 한국사회의 정치적 장을 지배하는 핵심 이미지로 기능한다. 요컨대 2017년 촛불시위의 흐름과 연계하여 해석하면 이런 것이다. ‘2017년의 촛불시위는 어떠한 이념과도 무관한 순수한 상식에 기반한 시위다. 마찬가지로 87년 투쟁은 시민들의 순수한 마음이 독재를 무너뜨린 사건이었다.’

영화 속 연희로 다시 돌아와 보자. 영화는 왜 연희라는 여성 캐릭터를 필요로 했을까. 혹은 연희의 아버지는 왜 체불임금에 저항하던 죽은 존재로 그려지는 것일까. 연희에 대한 해석은 이로부터 매우 다채롭게 전개됐다. 그녀는 87년 투쟁에서 여성의 주체성을 묘사한 존재로 이해되기도 하고 화이트칼라층의 주도적 이미지에서 배제된 노동자 투쟁의 함의를 간접적으로 함축하고 있다고 말해지기도 한다. 나는 이 모두가 일말의 진실을 함축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화이트칼라층 주도의 87년 기억은 연희의 이 캐릭터들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점, 87년에 대한 조금 더 디테일한 기억들이 보충될 필요가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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