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사명에서 청년의 피해자 의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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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경의 인문 책방…알렉산더 겔라 외 <인텔리겐챠와 지식인>

근대의 사회적 변화를 추동한 청년세대의 감수성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8-06-16 23:36:07

알렉산더 겔라 등이 편집한 이 책에서 인텔리겐챠와 지식인은 사실상 거의 동일한 말이다. 지식인은 서구 유럽에서 등장했고, 19세기 이후 체제의 부당성을 비판하는 엘리트 집단으로 이해됐다. 사실상 18세기의 계몽주의 지식인들이 근대의 비판적 지성의 첫 출현일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전환점은 19세기 말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에밀 졸라 등이 드레퓌스 부당한 처벌에 항거하면서 지식인의 사명이 세간의 화두로 떠올랐다.

이 책에서 3장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를 집필한 루이스 포이어는 지식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린다.

“지식인이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선택받은 자로 여겨왔다. 말하자면 그는 현대의 모세로서 역사적으로 부여받은 사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이 사명감은 지식인 의식에 본질적인 것이다”

지식인은 체제의 문제를 폭로할 사명감을 갖는 엘리트 집단을 부르는 명칭이었다. 인텔리겐챠는 19세기 이후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 식민지 해방 운동 등을 한 지식인들을 부르는 명칭이었다. 한국은 어땠을까. 식민지기에 친일로 빠진 지식인들도 많았지만, 체제에 저항한 수많은 인텔리겐챠들 역시 존재한다. 1970~80년대에 독재에 저항한 이들은 또 대부분 대학생들이거나 지식으로 무장한 엘리트 집단들이 아닌가.

지식으로 무장한 청년

근대화의 시작이 늦은 한국에서 지식인의 19세기 유럽적 의미는 1960년대 이후 활발하게 수용된 맥락이 있다. 당시에 대체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시대를 앞서간다는 것을 의미했고, 체제에 순응하기보다 주체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낸다는 것을 뜻했다.

70년대 이후 노동자들은 글을 배우고 싶어했고, 지식인들은 야학을 이끌며 이들에게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전해 주기도 했다. 80년대 대학사회의 학생운동은 또 어떠했을까. 당시의 팸플릿과 사회과학 서적들을 보면, 20대야말로 세계의 변화를 이끌 주체라는 자기의식이 (다소 과해 보이리만치) 상당히 팽배했음을 알 수 있다.

후발자본주의 국가에서 지식인이 된다는 것은 일단 뒤쳐진 이 세계(한국)에 앞서간 선진사회의 원리를 이식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알렉산더 겔라는 인텔리겐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텔리겐챠는 체제의 지배계급에 대해서는 그 부정적인 생활양식과 태도를, 중간계급과 하층계급에 대해서는 그 전통적인 보수적 생활양식과 역할을 거부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 계층의 형성을 위한 정신적 논거는 널리 인정되는 바의 소명, 즉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민족 하층계급의 해방을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역사적 소명을 위해 청년 엘리트들은 지식을 필요로 했고, 서구 민주주의와 사회과학을 통해 당대 한국의 척박한 현실을 비판했다. 반대로 지식의 새로운 중요성이 부상하면서, 세대 간의 갈등이 첨예화된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기성세대는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철저히 체제순응적인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청년 지식인들은 기성세대를 체제협력자로 간주했다.

피해자가 된 청년

이러한 근대적 지식인의 등장은 프랑스혁명을 경유해 19~20세기 세계사를 흔든 거대한 흐름으로 작용했다. 한국에서 이러한 저항적 청년 엘리트의 등장을 알린 대표적인 사건이 1960년의 4.19였고 1980년대는 그러한 청년 감수성이 대학사회를 지배하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최근 십 수 년의 시대 흐름 속에서 일정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19세기에도, 현재에도 세대갈등은 중요한 사회문제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청년세대는 기성세대의 부패함과 현실타협성에 큰 분노를 드러낸다. 문제는 이 세대갈등의 쟁점이 되는 방식이다.

앞서 봤듯, 근대의 청년 엘리트들은 사회변화를 이끌 주체라는 거대한 자의식을 소유했다. 기성세대의 무지 앞에서 지식으로 무장한 그들은 스스로를 선구자적 존재로 자각했다.

반면, 오늘날 그러한 지식은 사라져가는 듯하다. 청년들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은 역사적 소명보다는 오히려 ‘피해자’의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흙수저’론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들의 피해자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불안감일 수도 있고, 불만감일 수도 있으나 확실한 것은 지식의 어떤 확고한 객관성은 아니라는 점이다. 청년들은 이제 세계를 변화시킬 주체에서 세계로부터 피해를 입는 약자의 이미지로 전환했다. 이들의 세계관에서 다른 어떤 것을 더 읽어낼 수는 없을까. 근대 지식인의 등장을 말하는 이 책은 오늘날 청년 담론과의 비교에서 많은 고민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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