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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보다 일찍 찾아 온 폭염이 기승을 부리면서 전력 예비율에 사실상 비상등이 깜빡이자 탈원전을 강력히 밀어붙인 현 정부의 에너지 정책도 빨간불이 켜졌다. 다급해진 정부가 24기 원전 중 가동하지 않던 8기를 만지작거린 끝에 결국 1기 재운전을 신속히 결정하고 내친김에 내달 추가로 한 대를 더 가동하기로 했다. 마치 원전을 원죄의 대명사로 몰아붙이던 태도를 완전히 바꿔 갑작스럽게 구원의 손짓을 하는 모습이다. 어색하다 못해 민망하기 짝이 없다.
새 정부 들어 원전은 불문곡직 퇴출대상 최우선 대상에 올랐다. 문재인 정부 한 달여 정도 지난 작년 6월 18일 이후 고리 1호기에서는 더 이상 터빈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한민국 최초의 상업용 원자로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하루아침에 숨을 멈췄다. 이어 다시 한달 뒤 공정률 28%를 보였던 신고리 5·6호기에서도 망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정부의 공론화 방침이라는 지상명령에 따라 설계수명 60년의 최첨단 국산원전은 태어나기도 전에 숨을 거둘 운명에 처했었다.
이후 국민여론에 따라 건설재개 방침이 결정되는 초대형 해프닝으로 인해 결국 거액의 공사중단 비용을 허공에 날렸지만 원전 퇴출 행보는 멈추지 않은 채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데 해프닝이 일어난지 9개월이 지난 시점에서도 정부는 여전히 ‘탈원전 속 원전’이라는 어색한 스탠스다. 원인은 일찍 찾아온 무더위라고 하지만 그런 이유를 대는 정부의 무책임하고 근시안적 태도가 걱정을 넘어 공포스럽다.
탈원전 정책은 세계적으로 일종의 유행 같은 흐름을 보여줬다. 우리도 수십년에 걸친 치밀한 밑그림을 설계하지 않고 그 흐름을 탔다는 점에서 정책이 일관성을 갖기 어려운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올 여름더위는 그 상징적 사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탈원전을 외치면서도 원전에 의지하는 엇박자는 치밀해야 할 한 나라의 에너지 정책이 주먹구구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탈원전 카드를 들었던 선진국들도 줄줄이 유턴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일본을 비롯한 독일, 캐나다, 대만, 호주 등에서 시작한 탈원전 바람은 지금 전기요금 폭탄이라는 맞바람을 만나 백지화 되거나 주춤거리고 있는 중이다. 섣부른 신재생 에너지에 대한 환상은 생산비용 측면만이 아니라 장점으로 꼽히는 친환경 측면에서도 문제점이 속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1기가와트 전기를 생산하려면 태양광이 원전보다 12배 가량의 부지를 필요로 한다. 풍력은 무려 58배다. 이 같은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친환경적 요소를 두루 감안한 기반연구가 필수적이다. 당연히 수년 또는 수십년의 장기계획이 필요하지만 원전 대체수요를 감안해 서두르다 보니 환경파괴 여지를 두루 남겼다. 나아가 산사태 등의 문제로 인명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하는 문제에 이미 직면해 있다.
연료의 경우도 수송에 따른 비용 외에 환경오염 문제가 마찬가지다. 1기가와트 전기를 1년간 생산하는데 원전 원료는 28톤이면 된다. 반면 LNG 110만톤, 석유 150만톤, 유연탄은 220만톤 등이다. 화석연료 발전소를 줄인다고 하지만 원전을 줄인다면 당장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화석연료 발전소 가동을 늘려야 할 상황이다. 정부는 폭염 비상에 따라 화석연료 발전소 가동 확대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대책으로 화석연료 발전소를 줄이기 위한 대책이 시행돼 왔으나 이 조차 쉽지 않게 됐다는 뜻이다.
원전사고 공포의 중심에 있던 일본마저 지난 2015년 탈원전 방침을 철회했다. 호주도 지난해 10월 신재생 에너지 전략에서 손을 들었다. 전기수급에 문제를 겪거나 생산비용이 급격히 오른 다른 나라들도 신재생 에너지 정책에 회의감을 갖고 원전 회귀 대책을 강구중에 있다. 이 과정에서 원전 건설 확대에 대한 여론이 계속 확산되고 있지만 정부는 유독 이들 여론에만 눈을 감고 있다.
탈원전 뒷북을 친 우리나라는 일관되게 현실과 괴리된 길을 가고 있다. 현재 전력 예비율 10% 정도를 감안하면 안심해도 된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지만 전문가들은 가당치 않다고 쓴 소리를 하고 있다. 예비율 10%는 혹시 모를 발전소 고장이나 정비에 대비한 것인 만큼 이를 안정적인 수급 지표로 내세우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허울 좋은 명분에 휩싸여 생명수와도 같은 전기수급이 원활치 않으면 국가와 국민 모두가 큰 손해를 넘어 위험까지 마주하게 된다. 정부의 공약대로 한다면 2030년까지 혈세 370조원이라는 천문학적 투자비용이 들어가야 한다. 신재생 에너지 비중을 20%까지 늘렸을 때 추계된 금액이다. 문제는 혈세가 마구 투입된다고 해도 전기수급이 안정적일 수 있느냐에 있다.
경제의 젖줄과도 같은 전력공급이 시도 때도 없이 예측불허의 상황에 빠진다면 국가적·국민적 위기상황을 방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예측하지 못한 대정전 사태가 발생할 경우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서고 수돗물조차 쓰지 못하는 국민 일상생활의 불편함은 물론 의료기관의 수많은 환자들은 죽음의 공포에 빠지며 공장을 갑자기 세워야 하는 기업들은 납품기일을 못마추는 위기의 기로에 선다.
나아가 발전소의 도미노 과부하 사태로 연쇄정전 사태가 발생하면 복구하는데에만 수년이 걸린다. 대정전이 예측될 경우 순환정전을 한다해도 불안은 해소되지 않는다. 지난 2011년 순환정전 사태가 일어났을 때도 엄청난 국민적 불안을 야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복구에 수년이 걸렸다.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차별의 경제밥솥을 만드는 것이 훨씬 고통스럽고 힘겹다는 것은 자유시장경제에서 상식으로 통한다. 에너지 정책도 안전을 고려한 탈원전 정책을 이해하지만 그 보다 더 심각한 예측불허의 위협이 닥친다면 재고해야 한다. 외견상 좋아 보이는 정책들이 내막적으로는 위기를 가중시키는 경우가 정부정책에서 수없이 목도돼 왔다. 안전을 내세우지만 부지불식 위험을 더 키우는 정책의 중심에 원전이 있다는 것을 거듭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한국형 원전은 자체 기술과 운용능력이 전무하던 시절, 원전 선진국들로부터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비아냥을 받는 온갖 설움을 딛고 피땀어린 노력을 한 끝에 얻은 고부가가치 국가 브랜드다. 세계 최고수준으로 도약한 우리의 원전기술은 안전성 측면에서도 원전 선진국들과 대등한 위치에 있거나 앞서간다. 안전한 운용관리를 통해 설계수명을 잘 관리하면 중장기적인 에너지 안정화 대책을 짜는 것이 가능하다.
작년 겨울만 해도 원전 가동률은 절반 밖에 되지 못해 원전이 우리의 에너지 정책 가장자리로 내밀리는 듯 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분기별 원전 가동률을 보면 작년 3분기 70%, 같은 해 4분기 65%, 올 1분기 56.4% 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80%를 상회한다. 이 지표만 봐도 ‘원전이 있다면~어떤 위험이 있나’를 감안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원전이 없다면~ 어떤 위기가 닥치나’도 함께 되새기면서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
한울 4호기의 재가동 승인과 이어질 한울 2호기의 승인 등을 비롯한 정비연장까지 총 5기의 원전 가동은 미봉책이다. 통상 원전의 검사기간이 6개월 이상임을 감안하면 지난 5월 18일 검사에 들어간 한울 4호기 재가동 경우는 초고속으로 진행됐다. 안전을 최우선한 가운데 시행된 정비연장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다급했다는 것을 정부 스스로 자인했다. 이는 땜질조치라는 것을 드러낸 만큼 국민을 더 불안에 떨게 한 사건이다. 탈원전 로드맵에 대한 근본적인 대수술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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