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먹고사니즘의 바깥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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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재론

정치는 먹고사니즘의 바깥에 존재한다

생존의 기술에서 연대의 창조적 행위로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8-07-28 22:30:43

최저임금이 다시금 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한 이 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단연 생존이다. 청년들은 고용불안에 빠져 있고, 정규직이 되기 위한 을들 간의 경쟁을 시작했다.

빈곤층의 압도적 다수를 점하는 노년층을 위해 남겨진 일자리들은 거의 대부분이 계약직 불안정노동이다. 자영업자는 과연 사장님인가 노동자인가. 최저임금 이슈는 다시금 생존의 이슈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생존 이외의 것을 말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근대 이후 ‘정치’가 창조적인 연대의 행위에서 경제법칙을 관할하는 관리의 기술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정치를 가능케 하는 것은 웅변술이었다. 타인과 만난 그리스의 시민들은 말을 통해 타인을 설득하고, 교류를 하며 사고의 범위를 확장시키고자 했다.

정치는 인간의 다자성(pluraity)에 기반한다. 도시국가의 광장에서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감각을 갖는 이들과 마주하며 소통의 창조적 장을 펼쳐보였다. 이질적 감각 혹은 타인과의 마주침은 폐쇄될지 모를 도시국가 개개 구성원들의 감각을 열어젖히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근대에 이르러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광장의 개방성이 아니라 내면의 프라이버시다. 타인과의 마주침보다는 타인으로부터 보호가 이슈화되는 이 시대의 특성은 무엇인가.

영원성에서 불멸성으로

서양 고대철학에서 말과 사유는 항상 대립하는 무엇으로 간주되었다. 아렌트에 따르면, 이 대립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은 바로 영원성과 불멸성의 대립이다. 예컨대, 신은 영원하지만 인간은 유한하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은 글과 노동을 통해 자신들의 이름과 존재가치를 불멸의 것으로 축적할 수 있다.

개개의 인간은 반드시 죽음을 맞게 되지만, 집단으로서의 인간은 다양한 창작행위와 기록으로 불멸의 역사를 창조한다. 서양의 고대철학에서 영원성의 가치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다만 그것은 사색의 과정을 통해 인간에게도 스치듯 나타나는 무엇이기도 했다. 이는 영원성이 인간과 무관한 것은 아니되, 결코 소유될 수는 없다는 것, 인간의 통제력 바깥에 놓여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반대로 불멸성은 인간활동의 결과물이다. 근대의 기술적 진보는 이 불멸성에 대한 기대를 극단으로 올려놓았다. 중세 기독교는 내세에 대한 믿음을 통해 불멸성의 기대를 무력화했다. 반면, ‘진보’와 발전을 통해 특징지어진 근대의 출발은 인간역량의 극대화와 그에 대한 거대한 낙관이었다.

경제가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

이 낙관의 근거가 된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그것을 특징지은 것은 ‘경제’라는 새로운 인간활동 범주의 도래였다. ‘경제’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오이코스(oikos)는 원래 가계살림 정도를 뜻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확립되기 이전 전국적 단위의 살림살이라는 관념은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에 살림살이라는 관념은 기본적으로 개별 가정에 국한된 것이었고, 따라서 경제의 어원은 원래 가계의 살림살이라는 뜻을 가졌다.

반면, 근대로 오면서 생산수단들이 전 영토로 분배되고, 유통망은 지역을 초월하였다. 작은 커뮤니티 정도를 뜻했던 ‘사회’(society)는 이제 익명의 개인들이 교류하는 메트로폴리스적 관계망 일체를 뜻하는 것으로 의미변환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 사회라는 익명의 공간을 통해 재정의된 것이 바로 ‘경제’였다.

19세기에는 경제가 가정의 범주를 넘는 것임을 뜻하기 위해 ‘정치경제’라는 말이 활용되기도 했다. 문제는 이제 공개된 장소에서 타인과 마주치며 소통하던 시대에 단절이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경제적 시장의 지배가 모든 삶의 영역을 먹고사니즘, 즉 살림살이의 영역으로 축소시켰기 때문이다.

이제 타인과의 진정한 마주침, 혹은 창조적 소통이라는 것은 흔적을 감추게 된다. 사람들은 이 익명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이익추구임을 알게 되고, 자신의 자아가 익명의 시선에 노출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온라인을 통해 사생활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기도 하다.

이로 인해 공개된 장소가 아니라 내밀한 장소를, 개방된 장소와 발화행위가 아니라, 프라이버시와 심리학적 치유가 중시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 현상의 출발은 18세기의 루소였다. 고독한 자아에 탐닉했던 루소, 낭만적 사랑의 남성적 판타지에 빠졌던 괴테가 존재한다. 고독과 내밀함은 시장이라는 이름의 정글과 정확히 대칭관계를 형성한다.

그렇다면,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역량을 확장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인간 행위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적어도 그것은 먹고사니즘의 범주 바깥에서일 것이다. 내밀함에 대한 강한 집착을 집단적 연대와 창조행위가 대체하는 시간이 곧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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