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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인 80년 대 일이다. 실업급여에 대해 통치권자가 얼마나 낮은 인식을 가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5공 시절 전두환 대통령이 유럽에 갔을 때다. 평일 날인데도 바닷가 휴양지에 젊은 사람들이 잔뜩 놀고 있었다. 전 대통령이 ‘이 사람들 뭐하는 사람들이냐’고 묻자 비서관 한명이 ‘저 사람들은 실업자들인데 실업급여를 받아서 논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전 대통령이 화들짝 놀라면서 실업보험 제도에 대해 “절대로 하면 안 되겠구먼. 그거 나라 망하게 하는 제도”라고 했다는 믿거나 말거나한 일화가 있다. 이는 80년대 실업보험제도가 제대로 입법화되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을 걸었던 웃지 못 할 절대적 이유다.
1990년대,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군사정권의 힘은 조금씩 무뎌졌다. 6.10 민주항쟁의 성과물인 6.29 선언은 시민사회는 물론 노동계가 힘을 갖는 계기가 됐다. 노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고용보험 도입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한국노총은 1989년 9월 25일 국회에 고용보험제도 도입을 청원하고 같은 달 30일에는 노동부에 고용보험제도 도입을 건의했다. 이듬해 여야인 민자당과 평민당도 법 제정을 요구했다.
정부에서 법안을 만들어 의원입법 형태로 고용보험제를 추진했다. 이 때 실무를 맡은 이가 이번 식사 손님인 정병석 전 노동부 차관이자 현 한양대학교 경제학과 특임교수다. 정 전 차관은 당시 고용보험정책 과장을 맡아 실무를 챙겼다. 이때 만들어진 일화는 전 대통령 일화보다 더한 에피소드로 국가기록원에 의해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고용보험법 입법 과정 에피소드는 역사의 한 페이지
정 전 차관은 “주무 과장으로서 ‘고용보험 도입 필요성’이란 제목의 서류를 가져가면 최 장관은 한번 열어 보고는 발밑으로 던졌다”고 했다. 그리고는 “나는 반대요. 이거 하면 나라 망해요. 장관 바뀌면 추진하시오”라고 철저하게 반대했다. 이 같은 소리는 결재서류가 올라갈 때면 녹음기처럼 되풀이 됐다.
고시출신 행정 관료와 별정직 장관과의 끈질긴 싸움이 시작됐다. 정 전 차관은 같은 건 결재를 줄기차게 올렸고 최 장관은 번번이 같은 말을 되풀이 하면서 집어 던졌다. 때로는 반대한다는 데 왜 자꾸 가져 오냐며 역정을 냈다. 정 전 차관은 하는 수 없이 작전을 바꿨다. ‘고용보험제’란 용어 대신 ‘인력수급 원활화 대책’으로 제목을 바꾸고 결재를 올렸다.
기자 출신 최 장관은 귀로 듣는 보고보다는 결재서류를 눈으로 꼼꼼히 읽는 스타일이었다. 한참을 읽다가 “이거 결국 고용보험 하잔 이야기잖소”하고는 다시 반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노사정이 찬성하고 관련 부처가 전체가 찬성했지만 노동부만이 최 장관 때문에 반대를 했다.
비용부담으로 고용보험 도입에 소극적이던 경제단체까지 설득해서 부총리가 주관하는 정책조정협의회에 상정했다. 당시 최각규 부총리는 회의 말미에 “노동부장관은 주무부처니까 특별한 제안 설명이 없죠”라고 하자 최 장관은 “아니요. 할 말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반대합니다”고 폭탄발언을 했다.
최 장관은 회의 전날 정 전 차관에게 “장관이 계속 반대하는 데도 불구하고 전문 직업 관료가 1년 동안 줄기차게 소신껏 밀어붙이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감, 열정, 논리 등 충분히 명문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내일 회의에 가서는 공론에 따르겠다”고 말했던 터라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최 장관의 속내는 공론에는 ‘찬성’이었지만 역사에 남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대 발언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별정직 관료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 준 행동이었다.
장관, 끝까지 고용노동법 도입 반대…직업관료 소신으로 관철시켜
고용보험제도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정부는 제도 모형을 개발을 위해 1992년 고용보험연구기획단을 설치하도록 했다. 연구기획단은 발족 이래 1년 동안 40여회에 걸친 주요 쟁점별 토의를 거쳐 12월 중간 보고서를 노동부에, 1993년 5월 고용보험제도 실시방안을 정부에 제출했다. 같은 해 12월 1일 국회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하고 12월 27일 고용정책기본법과 직업안정법 개정안과 함께 고용보험법이 공포됐다.
이에 따라 정부는 94년 4월 노동부 직업안정국에 고용보험과를 신설해 고용보험제도 시행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초대 과장으로 정 전 차관이 임명됐다. 정 전 차관은 “당시만 해도 관료들이 책임감이 투철했다. 매일 같이 밤새 일하고 마치 ‘전쟁’ 같았다. 법조문 조사 하나하나 따지면서 심의를 거쳐 만든 것이 고용보험제도다”고 회상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98년 2월 업무를 시작하면서 전 부처 통틀어 첫 업무보고를 강남고용안정센터에서 받았다. 직전 김영삼 정부가 IMF를 끌어 들였기 때문이다. IMF로 인한 대량실업자가 양산되면서 사회문제가 커지자 이를 극복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담은 업무 보고였다.
이쯤에서 반추해볼 게 있다. 만약 고용보험법이 없었다면 IMF로 인한 대량 실업사태를 어떻게 넘겼을까 하는 문제다. 자칫 사회안전망이 완전히 붕괴될 뻔 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특히 발 빠르게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98년에만 고용노동법을 두 번이나 개정해 상시인력 1인 이상 전 사업장으로 범위를 확대한 것이 주효했다. 이때 촘촘하게 짠 사회안전망 때문에 IMF, 이후 금융위기 등을 별다른 사회불안 없이 무사히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정 전 차관은 고용보험제도에 대해 “타이밍 상 아주 잘 만든 제도”라고 자평했다. 제정할 때만 해도 IMF로 인한 대량실업이 발생할 것을 꿈도 꾸지 못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노동기구(ILO) 관계자들도 와서 보고 “체계적으로 관리를 잘했다”고 평가하고 성공사례로 배워 갔다.
정 전 차관은 “부처 간 협조와 조화도 좋았다. 정책 부조화를 경험하기 힘들 정도였다”며 “당시 공무원들 모두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서 일궈낸 성공적 정책”이라고 말했다.
정 전 차관은 2006년 1월 차관에서 물러나 한국기술교육대학 총장으로 간다. 2008년 6월 이명박 정권에 의해 임기를 못 채우고 학교를 떠났다. 전남 영광(靈光)이 고향인터라 TK정권에서 자의적으로 학교에 남아 있기가 힘들었다.
그가 학교를 떠날 때 날 때 전교생 3600명 가운데 3000여명이 편지를 써서 아쉬움을 전했다. 교수협의회와 학생들이 사퇴반대운동을 펼쳤지만 정부 방침을 따라야 한다며 홀연히 학교를 떠났다. 스스로 영광(榮光)스럽게.
경제와 문화 괴리 좁혀 국격 높이는 캠페인 준비 중
정 전 차관은 서울대 상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5년 제17회 행정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하고 공직을 시작했다.
1977년부터 30여 년간 노동부(현 고용노동부)에서 근무하면서 고용정책과장, 고용보험국장, 근로기준국장, 기획관리실장 등 주요 보직을 거쳐 노동부 차관을 역임했다. 요즘도 정권이 바뀌거나 개각설이 있을 때 고용노동부 장관 하마평에 오르내린다.
노동부 재직 시 최저임금제와 고용보험제 등 주요 제도 마련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지금은 한양대에서 후학 양성에 진력하고 있다. 또한 선진적인 우리 고용보혐 제도를 해외에 수출하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최근에도 고용보험 제도 보급을 위해 남미 쪽엘 다녀왔다.
아울러 우리 국격을 높이는 데 여생을 바칠 각오를 밝혔다. 소위 ‘한국의 국격 업그레이드와 국가경쟁력 제고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정 전 자관은 “우리 사회는 잠재성장률 정체, 양극화 심화, 주력산업 성장 침체, 기업활동 위축과 기업가 정신 쇠퇴, 청년 취업난 장기화로 도전정신 상실과 현실안주 등 사회 전반에 활력이 저하되는 가운데 국가 역량이 침체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우리의 진정한 위기는 사회 문화가 선진화 되지 못하면서 경제와 문화의 커지고 있는 괴리”라며 ”지식이 있는 전문가들이 용기 있게 나서서 문제제기를 하고 국민을 설득해 계몽하면서 사회문화를 계도하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정 전 차관은 이를 위해 사회문화 개조 포럼을 구성하고 저술활동을 강화하는 한편 팟 캐스트를 통한 대국민 교육 등을 아우르는 거국적 캠페인을 전개하자고 제안했다.
전남 영광 토속 맛에 길들여진 미각…변함없는 바닷가 입맛
영광이 고향인 정 전 차관의 입맛은 ‘바닷가’ 그 자체다. 바닷가 토속 입맛에 길들여진 미각은 식당 선택에도 늘 영향을 미쳤다. 몇 해 전에 식사 한번 하자던 곳도 노량진 순천식당이었다. 꼬막, 매생이국 등으로 추운 겨울 뱃속을 따뜻하게 데웠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이번 식사도 이름은 비슷하지만 다른 식당인 대치동에 있는 순천만에서 하자고 했다.
| ‘바닷가’ 맛 제대로 볼 수 있는 곳 ‘순천만’ |
순천만은 대치동 우래옥 건너편에 있다. 원래 보리굴비, 간장게장이 유명한 집이다. 최근에는 전남 신안에서 올라온 건정 민어를 가지고 여러 음식을 내놓으면서 서울 민어요리 명가가 됐다. 서울서 전남 바닷가 맛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다.
건정은 어류를 자연풍에 말린 것을 말한다. 신안 지역 특산물이다. 민어 건정은 귀한 어종 탓에 고급 먹거리로 자리매김해 있다. 품격 있는 맛집을 찾아다니는 페이스북 그룹 ‘미각포럼’(회장 황지희‧요리연구가)에서도 오는 28일 전 좌석 예약을 했다. 이 정도면 맛은 일단 합격이란 의미다.
정 전차관은 요즘도 가끔 영광을 내려가면 백합조개를 잡아다가 회, 샤브샤브, 무침 등으로 배를 잔뜩 불린다고 했다. 그만큼 토속적 입맛이란 것이다. 이날은 민어정식을 맛봤다. 길이 30센티미터가 되지 않는 민어를 신안에서는 통치라고 한다. 민어정식은 통치 찜에 민어회와 민어전, 민어탕 등 민어요리 4종이 메인으로 나오고 전라도 손맛의 각종 반찬이 상을 채웠다.
정미숙 대표는 고향 근동 귀한 손님이 오셨다고 민어 중에서 가장 귀하다는 부위를 들고 나왔다. 민어 수치에는 암치에 없는 내장 옆 덧살이 있다. 어민들은 민어 ‘삽겹살’이라고 부르는 부위다. 민어가 흰살 생선인데 이 부위는 덧살 부위는 유난히 붉은 색이 도드라진다. 식감은 몸통 살보다 아삭거리고 기름졌다.
민어가 복달임 음식으로 최근 각광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신안에 건정 민어 대량 양산체계가 갖춰졌기 때문이다. 신안건정영어조합법인(대표 유영업)은 지난달 25일 증도면에서 박우량 신안군수와 주민 등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명품 신안민어건정 가공공장’ 오픈 기념식을 갖고 민어 뿐 아니라 농어, 우럭 등 건정 가공 유통사업을 본격화했다.
한편 건정을 통해 유통기간이 늘어나고 배송이 편해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민어 요리를 사시사철 맛볼 수 있게 됐다. 특히 귀한 어종이란 특성으로 고급선물용으로 인기가 치솟고 있다. 입점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신라호텔이 신안 건정민어를 받아 이를 재포장해 선물용으로 선보이고 있다. 대기업 유통업체서도 앞 다퉈 입점 제안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섭씨 40도를 육박했던 무더운 여름, 정 전 차관과 민어 복달임을 했다. 평소보다 과하게 안동소주를 세병이나 비우면서 배를 채웠다. 식후 순천만 정 대표가 다른 방에서 보이차를 준비했다. 귀한 손님에 대한 환대의 의미로 손수 보이차를 다려 내 왔다. 그러면서 또 여름밤의 수다는 이어졌고 식당 문을 닫아야할 때,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파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파편처럼 박힌 단어 하나가 있다. ‘국격’. 정 전 차관은 국격을 높이는 캠페인에 필자의 동참을 구했다. 우연찮게도 몇 일전 친구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들은 터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국격,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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