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발전이 삶의 질 반드시 높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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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키워드 - 근대/현대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8-09-29 19:41:28

“같은 도시에서, 저녁이 되면 중요한 사건이 아침과는 다르게 이야기됩니다.”(라인하르트 코젤렉의 <지나간 미래>에서 괴테의 말을 재인용)

1829년 지인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괴테가 한 말이다. 같은 이야기가 아침과는 다르게 이야기된다는 것은 시대의 움직임이 빨라졌다는 것, 소통의 역동성이 커졌고, 문명의 발전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괴테의 이 말은 우리가 ‘근대’ 혹은 ‘현대’라고 부르는 시대의 특징을 함축하고 있다.

‘근대’ 혹은 ‘현대’라 번역되는 영어 modern의 어원은 라틴어 모데르누스(modernus)다. 이 단어의 뜻은 ‘오늘날’ 혹은 ‘현재의’를 담고 있다. 그러나 ‘현대’라는 뜻과 어원 modernus의 ‘오늘날’이라는 뜻이 과연 같은 것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이 시대를 일부 철학자들은 탈현대(탈근대), 즉 post-modern이라고 부른다. modern은 단순한 ‘오늘날’의 의미 이상을 함축하고 있다.

18세기 신조어의 탄생

‘근대/현대’라는 개념(이하 ‘근대’로 통칭)은 ‘현재’라는 단순 상대적인 의미보다 일정하게 지정된 시대상을 지칭하는 경향이 강하다. 예컨대,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은 중세적 지식인이라기보다 근대적 지식인에 훨씬 가깝다.

한국의 1960~70년대 산업화 과정을 근대화라고 부를 때, 이 ‘근대화’의 뜻은 18세기 이후 서구에서 본격화된 산업화 및 도시화를 의미했고, 문화적으로는 의무교육 등을 통한 국민‘계몽’을 뜻한다고 봐야 한다.

근대라는 단어가 지금처럼 특정한 시대상을 뜻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독일어 단어의 탄생이 여기서 무척 흥미롭다. 근대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 Neuzeit에 잠시 주목해 보자. 원래 이 단어는 ‘새로운’을 뜻하는 형용사 ‘neue’와 ‘시대’를 뜻하는 ‘Zeit’가 만난 형성된 신조어다.

18세기를 경유하며 유럽인들은 시대의 움직임에 큰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감지했다. 먼저, 인쇄물이 범람하며 지식을 교류하고 사회상을 비평하는 지식인 집단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7세기의 프리메이슨 집단부터 18세기의 계몽주의자들을 거치며 지식은 국가권력과 사회의 불의를 비평하는 강력한 무기로 부상했다. 그리고 이는 신분제를 기반으로 한 사회의 위계질서를 뒤흔드는 계기로 작용한다.

15세기 말 신대륙 발견 이후 지식인들은 인간이라는 종이 같은 시간대에서도 다른 문명의 시간을 살아간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요컨대, 문명의 진보를 맞본 유럽인들에게 아메리카는 열등한 야만의 대륙이었다. 18세기 말의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은 이러한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에는 ‘진보’하는 거대한 문명의 시간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정체된 반(反)문명의 시간이 존재한다.

여기서 근대의 시간관념이 새롭게 싹트기 시작했다. 자연이 순환하듯 인간의 신체는 태어나서 죽음으로 이르는 순환적 시간리듬을 숙명처럼 받아 안고 살아간다. 강산이 변하듯 왕조의 탄생과 몰락이 있고, 인간은 자연의 시간을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그런데, 이 자연적 시간을 뚫고 나온 것이 바로 모던한 시간, 즉 근대적 시간의 관념이었다. 순환의 운명적 리듬과는 다른 발전의 리듬, 죽음의 허무함과는 다른 무한 팽창과 진보의 열망이 그것을 특징지었다.

근대 혹은 새로운 시간의 열망

근대를 특징짓는 시간관념은 바로 ‘진보’다. 이는 오늘날 한국의 정치지형을 말할 때의 진보와 보수 프레임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관념이다. 정치적으로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인류는 모두 한동안 기술과 경제가 발전하길 열망했다.

이 열망을 지탱한 것은 앞서 언급했던 같은 시간대에도 다른 문명의 삶이 존재한다는 믿음이었다. 여기서 근대의 함의, 즉 ‘새로운 시대’가 충분한 함축을 드러낸다.

먼저, 그것은 어떤 질적 단절을 표방했다. 그것은 이전 시대와의 단절이자 동시에 다른 야만의 대륙과의 단절이기도 했다. 프랑스혁명을 통해 인권에 대한 선언이 이루어졌듯, 근대는 그 뿌리에서부터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출발에는 거대한 유토피아의 열망이 담겨져 있었다. 경제의 발전은 무한한 것이었고, 이 무한한 발전 속에 인류는 더 많은 행복을 안게 되리라 기대되었다. 이러한 기대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한 이 중 한 명이 애덤 스미스였다. 그의 ‘보이지 않는 손’ 개념에서 시장은 어떤 인위적 노력도 없이 자체 순환하리라 가정되었다.

스미스 이전에 이미 수많은 중농주의자들에 의해 가정된 이러한 가설 속에서 인간사회는 경제발전과 완전한 행복을 향한 유토피아의 도정에 있는 것처럼 그려졌다.

자연의 시간리듬과는 다른 이 근대적 시간관념을 18세기 이후의 지식인들은 ‘역사’라고 불렀다. 역사는 진보하고, 유토피아로 향한다는 믿음은 18세기 말 이후 ― 자유주의자부터 사회주의자들까지 ― 다수의 유럽지식인들이 공유하는 관념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은 이제 총체적으로 붕괴했다.

시장은 아무 개입 없이는 온전히 돌아가지 않았고, 경제발전이 삶의 질을 반드시 높이는 것도 아님이 드러났다. ‘노동’은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최대의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앞서 말했듯, 근대는 특정한 시대정신과 문명의 패러다임을 담은 하나의 시대상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근대-이후(post-modern)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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