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미래에 대한 꿈과 열망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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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경 인문책방

인문학 키워드 - 역사

고태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18-10-06 19:25:21

하루하루는 24시간을 단위로 하고, 1년은 365일을 기준으로 순환한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서 죽음을 통해 흙으로 돌아가고 물은 강과 바다와 구름을 거쳐 땅으로 순환한다.

자연의 모든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원래 있던 상태로 돌아가는 순환의 법칙을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유독 인간의 시간 개념에서만 일정한 일탈이 일어났다. 우리가 보통 근대라고 부르는 18세기 이후 이 변화는 시작됐다. 18세기 이전까지 인류의 사고에서 자연의 순환리듬을 벗어나는 시간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18세기의 산업혁명과 계몽사상을 통해 시간의 또 다른 개념이 분화되어 나왔다. 죽음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 시간, 영원히 진보하고 발전하며 최종적으로 유토피아의 낙원에 이르는 시간 관념이 생겨난 것이다.

미학화된 역사?

역사란 어떤 것일까. 역사를 뜻하는 영어 History는 이 단어가 기본적으로 어떤 이야기(story)를 함축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과거에 이 이야기들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채로웠고, 상호간에 어떤 공통점을 찾기 어려웠다. 예컨대, 식민지 팽창 중이던 18세기 유럽인들의 이야기가 있었을 테고, 조선 시대 백성들의 신화와 왕조서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신대륙 발견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자신들과는 다른 이야기의 세계를 발견한 유럽인들은 이 그 다른 이야기들을 위계서열의 하위로 놓고 시간을 일원화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문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보자. 우리는 미개한 문명과 진보한 문명을 구분하는 데 익숙하다. 선진국과 후진국이 있고, 제1세계와 제3세계가 존재함을 알고 있다. 이 모든 구분법은 각각의 세계가 각자만의 길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화된 하나의 길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 어떤 곳(서구)은 이미 충분히 발전하여 그 위계의 정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가정한다.

다윈의 진화론처럼 모든 것은 일원화되었다. 열등한 것은 도태되고 우등한 것은 살아남아서 하나의 보편적인 발전도식을 따라간다고 간주되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문제가 매우 복잡해졌다. 어느 문명이 우등한 것일까. 열등한 존재들은 도태될 텐데, 그렇다면 우리는 열등하지 않은 민족일까?

이러한 고민들은 역사를 대하는 사고들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과거의 지식인들은 미학과 역사를 확고히 구분했다. 사실관계를 다루는 역사는 허구를 창조하는 미학과 결단코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18세기로 오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요컨대, 과거는 미래로 가는 발전도식상에 있는 것이었기에, 혹은 그 문명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기에, 과거 자체가 미래의 가능성을 비추도록 창조적(혹은 미학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했다. 이제 작가와 역사가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역사와 ‘-주의’의 탄생

그 가장 일반적인 판본이 19~20세기에 세계에 퍼진 민족주의의 신화였다. 그리고 그 가장 극단적인 판본이 20세기 초중반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었다. 나치의 게르만 민족 신화에 따르면, 유대인은 열등한 민족이었다. 반대로 게르만 민족은 인류의 진보를 선취할 우등한 민족으로 간주되었다. 열등한 이들의 유전자가 우등한 이들에게 오염될 때 거대한 재앙이 도래할 것이며, 따라서 민족의 미래를 위해 유대인들은 박멸되어야 한다고 간주되었다.

미학과 역사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역사적 시간에 대한 감각 역시 역동적으로 변화했다. 과거에는 하나의 사건과 사실이 그 자체의 낱개로 존재하는 정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역사가 보편적인 발전단계의 도식을 취하면서 이제 시간관념은 그 발전의 정점을 향한 역동적인 (혹은 격정적인) 운동으로 감각되기 시작한다.

미래에 대한 거대한 열망과 꿈이 투사되었는데, 이 시점은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의 민주주의적 열망이 폭발한 시점이었다. 세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되었고,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세계를 살아갈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다. 무엇보다 이 변화는 궁극적으로 유토피아의 세계에 가닿을 것이라 기대되었다.

과거를 서술하는 역사가 사실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에 다름 아니게 되었다는 점, 사실관계를 서술하는 역사가 사실은 꿈과 열망의 미학적 감각에 심취되어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때 그 ‘미래에 대한 열망’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19세기를 경유하며 미래에 대한 지향을 표방하는 접미사 ‘-ism'(-주의)이 유행어처럼 확산되었다. 공화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의 용어가 이 접미사와 함께 등장했다. 이 용어들은 모두 미래의 사회상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 미래 사회상에 대한 신념은 사회 내에서 여러 정치적 당파들을 양산했다. 역사라는 개념은 18세기를 경유하며 세계를 바로 보는 상 자체를 변화시켰다. 그것은 근대사회의 축을 이루는 핵심 개념이면서, 당대인들이 세계를 시간적으로 감각하는 하나의 프레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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