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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처용무 전수조교인 인남순 한국전통문화연구원 원장을 처음 만난 것은 2013년, 무더위가 한창이던 8월 20일이다.
지방정재 연구 프로젝트 중 첫 번째 작품인 ‘평양정재 부벽루연회’를 무대에 올린 날 필자를 초청해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현장에는 ‘영원한 우군’인 부군 탤런트 강인덕 선생도 손님맞이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페이스북을 뒤져보니 그때 인 원장 부부와 찍은 사진이 나왔다. ‘남는 건 사진’이란 말이 실감난다.
평양정재 연구는 조선시대 대표적 화가인 단원 김홍도의 것이라 추정되는 ‘평양감사환영도’ 중 ‘부벽루연회도’에 그려진 의례와 악가무(樂歌舞)를 현실세계로 재현한 작업이다.
헌반도, 처용무, 포구락, 검무, 고무 등 5종의 춤을 축으로 만파정식지곡, 헌천수, 관악영산회상, 관음찬, 향당교주, 절화, 서도소리 관산융마, 시조, 지화자, 타령 등 갖은 가락을 담아 복원시킨 귀중한 프로젝트다. 지상(紙上)에 존재했던 1차원적 콘텐츠를 3차원으로 만든 멋진 연출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대는 오방색 가득 화려했고 악가무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환영만찬은 평양감사의 위용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팽팽하고 절제된 춤과 가락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긴장 속에 침을 꿀꺽 삼키게 할 정도로 감칠맛 났던 기억이다.
‘평양감사환영도’는 1745년 새로 부임한 평안감사를 평양 백성들이 환영하며 베푼 연회 장면을 세 폭에 걸쳐 그린 그림이다. ‘부벽루연회도’와 함께 ‘연광정연회도’, ‘월야선유도’로 구성돼 있다. 평양감사 부임 잔치의 규모가 대단했던 이유는 왕권이 점차 미약해지는 북쪽 지역을 관장하는 암묵적 권한이 주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평양정재 연구 50년…그림을 문화 콘텐츠로 부활
인 원장은 이듬해인 2014년 8월 26일 같은 장소에서 평양정재 프로젝트 두 번째인 ‘연광정정회도’를 해석한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화려한 의상의 기녀들을 차례로 소개하면서 연회가 시작됐다.
학무에 이어 학이 연꽃을 쪼니 꽃 속에서 동녀가 나오는 연화대무를 비롯해 포구락, 선유락, 사자무, 처용무 등이 선보였다. 그림으로 존재했던 춤사위가 현실 세계로 걸어 나올 수 있던 것은 오롯이 인 원장의 천착 덕이다. ‘월야선유도’는 배 위에서 펼쳐진 것이라 춤사위가 몇 개 없어 따로 공연하지 않았다.
인 원장은 당시 한 방송과 인터뷰에서 “궁중에서만 췄던 춤들이 음악과 함께 모두 평양에서 대대적으로 했던 이유를 알게 됐다”고 밝힌바 있다. 궁중무용인 정재에 속하는 춤이 지방으로 전수되면서 지방색과 만나 새로운 무용으로 발전한 것이 이유라는 것이다. 마치 궁중음식이 대신들의 반가를 통해 궁 밖으로 전해진 것과 같은 이치다.
인 원장은 심천(心泉)이란 호를 가지고 있다. 그의 스승인 고 심소(心韶) 김천흥(金千興) 옹이 밀레니엄이 시작된 2000년 첫 날 지어줬다. ‘끝없이 새롭게 샘솟아야 하는 예인의 정신을 잊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
김 옹은 이왕직 아악부(국립국악원 전신) 2기생으로 15세 때 순종 임금 탄신 50회를 축하하는 어전 공연에 무동으로 뽑혀 공연한 국악사의 산 증인이었다. 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해금과 일무), 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된바 있다. 인 원장은 처용무 맥을 잇고 있는 전수조교다.
평양정재를 비롯해 인 원장 무대 관람에 빼놓을 수 없는 재미가 한 가지 있다. 다름 아닌 평양감사나 고종 황제로 등장한 인물이 누구인지 하는 것이다. 수염을 붙이고 분장까지 한데다 갓까지 쓰고 나와서 관객석에서는 누군지 알 수가 없다.
무대 인사를 할 때서야 인 원장이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누군지 밝히는 데, 호명과 동시에 객석에서 감탄이 터져 나온다. 부벽루연회에는 남산골한옥마을 한덕택 예술감독, 연광정연회에는 문용린 전 교육부장관이 평양감사로 분했다. 궁중연회연구 50주년 기념공연에는 김명곤 전 문화체육부장관이 고종으로 분장하고 나왔다. 이때 한 감독은 고종황제의 이 씨 종친으로 나와서 과객에게 재미를 더해줬다.
무형문화재 김천흥 옹에게 사사…처용무 전수조교로 맥이어
2017년 11월 22일 있었던 공연은 인 원장의 정재연구 50년을 대한제국 고종황제 오순 함녕전 내진연 중 만수무, 장생보연지무, 보상무, 무고, 가인전목단 등 5종과 1930년 영친왕 환국 근친연 중 처용무, 그리고 춘앵전을 선보였다.
막이 내려오고 스포트라이트에 한 사람이 등장했다. 김영운 한양대 국악과 교수(국악과장)다. 자신을 인 원장의 국악중·고등학교 동기 동창, 50년 지기라고 했다. 인 원장의 정재 50년 목격자이자 증인인 셈이다.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 그 자리에 섰다고 말했다.
인 원장의 정재는 철저한 기록분석과 고증의 시간이다. 춘앵전(春鶯囀)은 원래 독무다. 지금껏 군무를 봐왔던 터라 생소했다. 독무에 인 원장이 직접 나섰다. 50년의 지난한 정재 연구에 반환점을 찍는 자리다.
노란색 앵삼에 화려한 화관을 쓰고 한 평 남짓한 화문석을 벗어나지 않고 추는 절제미와 화려함 양수겸장의 춤이다. 춘앵전을 추는 앵삼 속 인 원장의 발걸음이 지난 반세기를 무게감 있게 되짚었다. 화관 아래 얼굴 표정은 후회가 없었노라고 말하는 듯 했다.
독무가 어느 정도 이어지는 중에 제자들이 무대 양 옆에서 꾀꼬리처럼 날아들었다. 무대 전체가 노랗게 물들었다. 화려함을 넘어 장엄한 날개 짓이 무대를 지배했다. 반백년을 정리하기에는 두 시간이 너무 짧고 야속하다. 그러나 인 원장은 이제 절반을 왔기에 회한 따윈 없다고 했다. 외려 앞으로의 용맹정진을 약속했다.
“동네 무용학원을 다니다가 국립국악원 부석 국악사양성소에 입문하여 정재를 답습한지 올해로 오십년이 되었으니 이 또한 지천명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어찌 제가 감히 천명을 알아듣고 입으로 말하겠습니까? 다만 아직도 갈 길이 남아있기에 삼가 천명을 좇아 더 옷깃을 여미자고 스스로 다짐할 뿐입니다”
2017년 한류문화대상 수상…올 광복절 행사 메인 장식
이 같은 노력의 결실로 인 원장은 지난해 12월 7일 국회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제7회 대한민국한류대상 시상식에서 피아니스트 임동창, 요리연구가 박종숙 씨 등과 함께 한류 공헌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상을 수상했다.
인 원장은 매년 주제를 달리하는 굵직한 공연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올해는 더더욱 바쁜 한해를 보냈다. 올 4월 15일에는 남산골한옥마을 천우각에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인 처용무, 택견, 아리랑, 강강술래와 미등재 된 검기무 등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8월 15일 광복절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남북한의 처용무를 선보였다. 북쪽인 평양의 대동강변 부벽루연회와 남쪽의 한성에서 열린 영친왕 근친연 때 췄던 남북의 처용무를 공연한 것이다.
남북화해 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이날 행사는 문재인 대통령까지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40도에 육박한 날씨였지만 중앙박물관 대마당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처용무 배우는 시간을 갖는 등 열정의 시간을 보냈다.
겨울은 체력보강의 계절이다. 외부 공연 일정을 최대한 줄이고 국가무형문화재교육전수관 전수수업과 특강을 위주로 활동한다. 교육전수관에는 월·수·금·토·일 거의 매일 나가다시피 하고 있다. 40~50명씩 동원되는 군무를 펼치다보니 연습 시간이 상당량 필요하다. 이를 진두지휘하고 춤은 물론 노래, 음악까지 모두 총체적으로 강습하다보니 실상 겨울도 쉬어가는 시간이 결코 아니다.
3년째 이어온 日 공연…내년엔 궁중음식과 협업
지난 21일에는 일본 나라(奈良)현에 있는 이코마(生駒)시에 다녀왔다. 3년 전 부터 매년 이맘때 ‘역사의 바람’이란 주제로 열리는 우리 전통춤 공연을 하기 위해서다. 이 행사는 이코마시가 주최하고 시 한국민단이 기획운영, 그리고 오사카총영사관 한국문화원이 후원을 한다.
이번 행사는 특히 교기(行基, 668~749년) 스님 탄생 1350주년을 기념해서 열렸다. 교기는 대중포교와 사회사업에 힘을 썼고 가난한 농민들을 위한 농촌 개량사업에 진력한 백제계 최초 일본의 큰 스님이다.
인 원장은 “나라현에는 한사모(한국문화를 사랑하는 모임), 인사모(인남순을 사랑하는 모임) 등이 조직돼 있을 정도로 우리 것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다”며 “내년에는 궁중음식을 하는 분과 함께 온다고 하니까 교민들이 너무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미 내년도 행사 밑그림을 머릿속에 그렸다는 의미다.
| 속편한 밥상 연희동맛집 ‘고미정’ |
연세대 북문 입구에 위치한 고미정은 한정식 전문점이다. 이천햅쌀만 사용하고 음식물을 재활용하지 않는다는 등 다섯 가지 약속을 벽에 붙여 놓고 영업하는 곳이다.
국내산 고춧가루와 이를 이용해 직접 담근 김치만을 사용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자연산 우럭과 언제나 정성과 친절을 다하겠다는 다짐도 다섯 가지 약속에 포함돼 있다.
일대가 상권이 활성화되지 않은 곳이라 호젓함을 원하는 손님들에게는 고미정이 외려 매력적일 수 있다. 주택을 개조해 만든 데다 석조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길이 고즈넉해서 옛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등 일단 식욕을 돋우는 데 성공적이다.
가장 많이 찾는 쌀밥정식은 여섯 가지 식전음식에 이천쌀로 만든 돌솥밥, 조미료를 일체 넣지 않은 토속 계절 밑반찬, 된장찌개와 생선구이가 제공된다. 불고기정식은 고미정만의 레시피로 제주 고사리를 넣어 볶았다. 알찬 게장정식은 서산 꽃게를 이용해 담아낸다.
인남순 원장과는 쌀밥정식과 게장정식을 시켰다. 인 원장은 가족 회식을 자주하는 곳이라고 했다. 간이 세지 않아 입맛에 잘 맞는다고 덧붙였다. 자주 와서 먹는다며 게장 게딱지를 강권하다시피 건넸다. 엄마 같은 푸근함을 느꼈다면 인 원장께 결례가 되는 것일까. 하기야 같이 찍은 셀카를 보니 아무리 필자가 한참 어리다고 강변해도 안 믿겨 보인다.
얼마 전 장(醬)의 고장 순창에 들러 순창시민들이 가장 많이 가는 한정식집엘 갔다. 올 여름에도 한번 갔던 터라 믿고 갔는데, 맛이 너무 변해서 동행자들에게 미안했던 적이 있다. 이 집도 고미정과 비슷한 가격대의 경량급 한정식집인데 반찬 가짓수는 두 배 가까이 된다. 미처 손을 못 댄 반찬이 있을 정도로 가짓수는 많으나 질(質)을 따라 가지 못했다. 결국 한정식은 양보다 질이다. 식사량이 많지 않은 시대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늦도록 담소를 나누고 있던 중에 퇴근하는 주방 찬모들과 마주쳤다. 음식이 맛있었다고 인사를 전하자 활짝 웃는 모습 속에서 음식에 담겼음직한 선한 기운을 느꼈다. 음식은 테크닉을 통해 맛을 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을 조리해내는 조리사의 심성이 어떻게 손끝을 통해 식재료에 전해지는지도 중요하단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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