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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당나라 군대의 선봉에 선 연남생

당나라 이적, 연남생 추종세력 이용해 16개 성 빼앗아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9-03-09 17:10:00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연개소문의 임종은 개화(보장제) 16(657) 107일이고, 묘는 운산(雲山)의 구봉산(九峰山)에 있다는 기록이 있디. 그 운산은 어디인지 불분명하고 구봉산에 대해 알아보겠다. ‘중국백도백과(百度百科)’에 의하면 대륙 전역에 있는 아래 16군데의 구봉산 중 당시 고구려의 강역 안에 있는 산은 산서성 예성현의 대왕(大王)진 북쪽 10km에 있는 해발 1600m의 구봉산뿐이다.
 
구봉산 소재지로 꼽히는 곳은 사천성 팽주시(四川省 彭州市) 절강성(浙江省)의 영파시(宁波市)와 금화시(金华市) 복건성 남평시(福建省 南平市) 호남성(湖南省)의 형양현(衡阳县)과 상향시(湘乡市)와 쌍봉현(双峰县) 내몽골 포두시(内蒙古 包头市) 강서성(江西省)의 의황현(宜黄县)과 상고현(上高县) 하남성 여주시(河南省 汝州市) 호북성 무한시(湖北省 武汉市) 산서성 예성현(山西省 芮城县) 하북성 섭현(河北省 涉县) 광동성 소소현(广东省 韶关市) 중경시 합천구(重庆市 合川区) 등이다.
 
현재 예성현에는 인근 영락진에 있다가 수몰되어 옮겨진 영락궁(永樂宮)이 있는데, 중국은 원나라 때 세워진 도교사원으로 명나라 영락제와의 관련을 말하고 있으나 이는 어불성설로 광개토호태왕의 유적지가 분명하다. 아래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의 설명에서 보듯이 영락진은 북위(386~534) 때 최초로 칭했다고 하는데 이 때가 광개토호태왕의 아들 장수왕이 다스리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북주 때 치소 황성현에 속했다. 당이 황성현 동북 2리에 있는 영고보를 영락현으로 나누었다. 송 때 진으로 되고 고성은 산서성 영제현 동남 120리에 있다. <환우기> 주 때 영락현이 되었고, 군으로 가진 않았다. 수지에 영락군으로 만들어졌고 자는 오기다. 한 때 북평현이라 했으며, 북위 때 영락현으로 불렀다. 당 천보 원년(742) 만성현으로 개칭했다
 
<태백일사> 기록에서 연개소문의 묘가 있다는 구봉산이 예성현 대왕진 북쪽 그 구봉산이라 하더라도 지금은 연개소문의 이름으로 무덤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여하튼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민족의 대영웅 연개소문이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정복군주 호태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영락궁의 뒷산에 묻혔다는 것은 뭔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 예성현 영락궁 모형도의 본전 건물 뒤편으로 무덤과 곡장이 보인다. [사진=필자 제공]
 
천하의 대영웅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들끼리 반목해 형제간에 서로 죽고 죽이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 남생이 지방순찰을 나간 사이에 정변을 일으킨 남건·남산 동생들은 왕명으로 형인 남생을 소환하자 두려움을 느낀 남생은 이를 거부했고 남건은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형을 토벌하려 했다. 남생이 망명해버리자 보장왕은 대신 남건을 막리지로 삼아 안팎으로 군사에 대한 직무도 겸하도록 했다
 
한편 국내성으로 도주한 남생은 아들 헌성(獻誠)을 당나라에 보내 구원을 애원하니 당 고종이 계필하력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정중히 맞이하게 하고는, 6669월에 남생을 특진요동도독 겸 평양도안무대사(特進遼東都督·兼平壤道安撫大使)로 삼고 현도군공(玄菟郡公)으로 책봉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 KBS 드라마 대조영, 당나라 군대의 선봉에서 조국을 치는 연남생 부자 [사진=필자 제공]
 
이어
12월에는 이적(李勣)을 요동도(遼東道) 행군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고, 방동선과 계필하력을 부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고, 기타 수륙군 부대의 총관들은 모두 이적의 지휘를 받게 했다. 연남생은 동생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민족인 당나라 군대의 선봉에 서서 조국 고구려를 공격했다.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고 참패해서 돌아간 지 20년 만에 고구려와 전면전을 벌이는 당나라 군대의 선봉에 연남생이 서자 고구려 내부의견이 양쪽으로 갈리게 되었다.
 
당나라의 총사령관 이적은 요수(遼水)를 건너면서 모든 장수들에게 신성(新城)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요충지이니, 이곳을 먼저 얻지 않으면 다른 성을 쉽게 빼앗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여기서의 요수는 바로 낙양 북쪽을 흐르는 황하이거나 그 지류로 요택과 접하는 강이다. 수양제는 요동정벌 시 요택을 지나고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심수(沁水)의 물을 끌어 남쪽으로 황하와 연결시키는 영제거(永濟渠)라는 수로를 건설했다.
 
이적이 말하는 신성은 바로 <삼국사기>에서 고국원왕 9(339) 모용황이 쳐들어와 신성에 이르자 고구려가 화맹을 요청해 그냥 돌아갔다와 같은 신성이다. 또한 같은 내용이 기록된 <통감> “신성 서남에 방산이 있고, 동북쪽으로 남소(南蘇)성과 목저(木氐)성과 접한다는 주석이 붙어있는데, 이는 아래 설인귀가 빼앗은 성들의 이름과 일치한다. 이곳이 바로 현토군의 땅이었던 것이다.
 
<중국백도백과>에는 하남 상구현 서남 하남성 이천 서남 섬서성 등성현 동북 20산서성 삭주 시 삭성구 서남 등 5군데 신성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그중 곡옥(曲沃)으로 춘추시대 진() 땅이다. 좌전희공 4년에 태자가 신성으로 달아났다. 두주에 신성은 곡옥 지금의 산서성 문희현 동쪽 20리다라고 설명된 것이 바로 위 기록의 신성이다. 현대지도에는 양분현(신성진)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 산서성 남부 곡옥에 있는 신성 [사진=필자 제공]
 
이적이 신성을 공격하니 신성 사람 사부구
(師夫仇) 등이 성주를 결박하고는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했고, 이적이 병사를 이끌고 계속 진격하자 16개 성주들 모두가 항복했다. 이것이 바로 당나라가 노린 연남생 효과였다. 아직도 고구려에서는 직전 막리지였던 연남생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667년 가을 9월에 이적이 요충지인 신성을 함락시키고 계필하력에게 그곳을 수비하게 했다. 이때 연남건이 군사를 보내 신성에 남아있는 방동선과 고간(高侃)의 병영을 습격했으나 설인귀가 나타나 이를 물리쳤다. 고간이 금산(金山)으로 나와 싸우다 패해 고구려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추격했으나, 설인귀가 측면을 공격해 고구려 군사 5만여 명을 죽이고, 남소·목저·창암(蒼嵒) 3성을 빼앗은 뒤 남생의 군대와 합세했다. 갈수록 점점 사태가 심상찮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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