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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년 9월 이적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평양성을 포위하자 보장왕이 연남산을 사자로 보내 항복을 청하고 역적 신성이 성문을 열어주는 바람에 평양성이 마침내 함락되고 연남건이 생포됨으로써 장장 900년을 이어오던 고구려의 사직이 졸지에 끝나고 말았다. 평양성 건물들과 함께 수많은 역사서와 문서들이 4개월간이나 불타는 분서갱유까지 일어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시 고구려 군대의 주력인 요동성, 안시성, 서안평 등이 그대로 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켰듯이, 이적 역시 연남생을 향도로 앞장서게 하고는 평양성 길목에 있는 성들을 점령하지 않은 채 직접 도성으로 진군해 함락시켰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아직 고구려가 완전하게 망한 게 아니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668년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될 때 진국(振國)장군 대중상(大仲象)은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보장왕의 항복소식을 듣고 무리를 이끌고 개원을 지나는데 순식간에 8000명이나 모여들었다. 동쪽으로 동모산(東牟山)에 이르러 웅거하면서 성벽을 굳게 하고 나라를 세워 후고구려(後高句麗)라 칭하고 연호를 중광(重光)이라고 했다. 이르는 곳마다 격문을 전하니 원근에서 귀속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옛 고구려의 땅을 회복함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645년 야심차게 요동정벌을 왔다가 안시성에서 눈에 화살을 맞고 도망치다가 퇴로가 끊긴 요택에 갇혀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당 태종 이세민의 무덤 앞에서 불과 23년 만에 상황이 역전되어 고구려의 태왕과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참배하는 장면을 상상하노라면 억장이 무너지지 않을 수 없다.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대표적인 항복의식에는 웃통을 벗고 양을 끌고나오는 육단견양(肉袒牵羊), 몸을 밧줄로 묶고 옥구슬을 입에 물고 등에 관을 지고나오는 함벽여츤(銜璧輿櫬)이 있는데, 모두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은 기본이었다. 어떤 의식이었는지는 기록에 없으나 아마도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행한 항복의식 그대로였을 것이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 태종에게 1번 절할 때마다 3차례 이마를 땅에 대는 행동을 3차례 반복하는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가 치욕적인 항복의식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대단히 와전된 것으로 우리 민족의 전통예법인 삼육대례(三六大禮)처럼 윗분에게 존경을 표하는 인사예법이다. 중화사상에 마취된 인조에게 청나라와 조선은 같은 단군의 후손임을 잊지 말라는 충고의 메시지를 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당 고종은 고구려를 평정한 초고수훈자 천남생을 우위대장군으로 삼고, 변국공(卞國公)으로 올려 봉하고 식읍 3000호를 주었다. 일제 때 이완용처럼 나라를 팔아먹고 고위직에 올라 개인적으로 치부하고 호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천남생이 갑자기 큰 병을 얻어 679년 1월 29일 4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하늘이 벌을 내렸던 것이다.
끝까지 저항했던 연남건을 죽이지 않고 검중(黔中)으로 유배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사연은 천남생묘지명에 새겨져 있다. “승리를 아뢰는 날 남건을 바로 주살하기로 했는데, 공(남생)이 천륜(天倫)의 절실함을 느껴 궁궐에 와서 채숙(蔡叔)의 예로 살펴줄 것을 간청하니 상(고종)이 감동해 남건을 공공(共工)처럼 유배 보내는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 이처럼 지극한 형제간의 우애를 모두 높이 여겼다”
채숙(蔡叔) 도(度)는 주 무왕의 동복아우(5자)였다. 무왕(2자)이 죽고 나이 어린 아들이 즉위하자 동생(4자) 주공 단(旦)이 섭정으로 보필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은 주왕의 아들 무경과 형(3자)인 관숙 선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두 사람은 죽고 채숙 도는 동생(5자)이라 선처해 유배 보낸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남생은 비록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동생이라는 이유로 남건을 구명했다.
668년 당나라는 고구려 지역의 5부와 176성의 69만여 호를 나누어 9개의 도독부와 42주, 100개의 현으로 만들고, 평양에 설인귀를 수장으로 하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해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이들을 통치하게 하면서 고구려 출신 장수들 중에서 공로가 있는 자들을 발탁해 도독·자사·현령으로 삼아 이 지역을 다스리는데 참여하게 했다. 강주(絳州) 용문(龍門) 출신 설인귀가 안동도호로 발탁된 이유는 그가 고구려에 대해 잘 아는 고구려 출신이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중국기록에 백제가 고구려보다 더 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백제 역시 5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37개의 군과 200여개의 성, 76만호로 나누어 통치했고, 그 땅에 5개의 도독부를 설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던 고구려를 엄청나게 축소시킨 것으로 보인다.
12월 17일 당나라 고종이 남교에서 제사를 지내고 고구려를 평정한 것을 고했는데 이 때 장수 이적이 아헌관(亞獻官)이었다. 19일에는 태묘를 배알한 이후 칙령을 내려 요동 정벌을 떠난 군사들 가운데 도망친 병사는 기한 내에 자수하지 않거나 자수했다가 다시 도망친 병사들은 가차 없이 목을 베고 그 처자식들을 노비로 삼으라고 명했다.
그러자 태자가 표문을 올려 “이와 같이 행동한 병사들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혹 병을 만나서 대오를 따라잡지 못해 두려워 도망친 병사도 있고, 혹은 황해를 건너다가 빠져 죽은 병사도 있고 또 고구려의 안마당까지 깊이 들어갔다가 다치거나 죽은 병사도 있습니다. 군법이 엄정하고 무거운지라 같은 부대의 병사들이 나란히 죄를 받을 것이 두려워 같이 도망쳤습니다”
“또한 군대가 행군 도중에 조사할 여가가 없어 급하게 보고한 것을 근거로 처자까지 관노로 삼는 것은 실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서경>에서 말하기를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느니 차라리 비상(非常)한 것을 잃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도망간 병사의 처자들을 유배시키거나 노비로 삼는 것은 면제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고하니 허락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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