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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5년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1432년(세종 14년)에 완성된 「신찬팔도지리지」가 있었음에도 다시 「팔도지리지」를 만들라는 어명을 내렸다. 왜 불과 23년 만에 다시 전국지리지를 만들라고 명한 것일까. 게다가 「신찬팔도지리지」는 8년 만에 완성되었는데, 왜 「팔도지리지」는 23년 만에 완성되었을까? 그 이유는 고명 과정에서 요구된 명나라의 기준에 짜 맞춰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1478년(성종 9년) 간행된 「팔도지리지」는 1484년(성종 15년) 발간된 「동국여지승람」으로 이어졌고, 이를 교정·보충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1530년(중종 25년) 간행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왜 불과 46년 만에 새로운 지리지의 교정 보충이 필요했을까. 게다가 「신찬팔도지리지」와 「팔도지리지」가 현재 전해지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중종반정 이후의 역사 말살
성종 때 안정기를 구가했던 조선 왕조는 연산군 때에 이르러 다시금 두 차례의 사화(士禍)가 일어나는 등, 정치가 몹시 요동쳤다. 연산군은 주지육림에 빠져 정사를 그르치고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인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록에는 130여 편의 시가 전하는 등 시문에 밝았고 문화·예술을 적극 장려한 군주였다고 한다.
연산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 육조 직계제를 시행했던 태종과 세조보다 더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던 임금이었다. 무오사화를 통해 자신의 왕권을 강화한 연산군은 당시 궁핍했던 왕실의 재정충당을 위해 그동안 수많은 공신들에게 하사되어 세습되던 토지를 몰수하려 했다. 이 기득권 숙청작업이 바로 ‘갑자사화’였던 것이다.
자신들의 토지를 국가에 빼앗길 위기에 처한 기득권층이 반정세력에 동조하면서 거사가 성공해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박원종은 반정의 대의명분을 위해 가장 먼저 연산군의 역사기록부터 고쳐야 했다. 현재 남아있는 연산군의 모든 기록이 악행뿐인 이유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또한 새 임금으로 추대된 중종에 대한 명나라의 승인이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다. 멀쩡하던 국왕이 특별한 사유도 없이 갑자기 바뀌었는데 상국인 명나라가 그대로 승인해줄 리가 있었겠는가.
결국 반정세력은 평소에 지병이 많았던 연산군이 건강상 이유로 이복 동생(중종)에게 양위했다고 꾸며댔다. 명나라에서는 “양위하면 당연히 세자가 있는데 어떻게 이복동생이 왕이 되느냐”고 따져 물었다. 잘못하면 반정세력들이 명나라에 의해 오히려 반역도당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할지도 모를 상황이 되었다. 이에 반정세력들은 세자를 비롯한 4명의 연산군의 아들들을 모두 죽이고는 전부 몹쓸 병에 걸려 죽었다고 둘러댔다.
이번에는 명나라에서 전왕(연산군)이 살아 있으므로 신왕(중종)의 등극을 허락할 수가 없다고 나왔다. 그러자 박원종은 연산군을 바로 죽여 버리고는 “폐주가 갑자기 학질(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고 이야기를 꾸몄다. 연산군은 음력 11월인 겨울철에 죽었는데, 어떻게 여름철에나 있는 모기가 일으키는 질병에 걸려 갑자기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명나라는 반정으로 추대된 중종을 승인해주는 대신 약점 많은 조선 조정에게 우리 고대사를 스스로 조작하도록 요구했을 것이고 세조처럼 그대로 수용하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었을 것이다. 왕도 맘대로 바꿨는데, 그까짓 역사책 문구를 바꾸는 것쯤이야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 이미 선대왕들의 수거령에 의해 많은 고대 사서들이 궁궐에 감금되어 있는 상태였다.
현존하는 「삼국사기」의 최고 오래된 옥산서원본이 바로 중종의 집권 초기인 7년(1512년)에 발간된 것이다.그 이전에 간행된 「삼국사기」가 전해지지 않는 이유는 중종 때 새 「삼국사기」를 편집하면서 그이전 간행본을 모두 회수해 파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명 과정에서 요구된 명나라의 입맛에 맞게 내용을 고치고 새로 발간까지 하려면 그정도 세월은 필요했을 것이다.
1530년(중종 25년)에 간행되어 현재 전해지고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구려의 요동성이 황해도 수안에 그려져 있고 안시성을 평안도 중화군에 그려놓는등 중국 대륙에 있던 고대지명들이 한반도로 옮겨져 있다. 이처럼 「신찬팔도지리지」와 「팔도지리지」가 현재 전해지지 않고 당시 새로운 지리지가필요했던 이유는 아마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새롭게 각색된 가짜역사를 끼워 맞춰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조선 조정의 우리 고대사 말살의 실상은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태백일사」를쓴 이맥 선생의 발문에 잘 나타나있다. “16년(중종 1520년) 내가 찬수관으로 뽑혀 내각의 여러 비밀서적들을 얻을 수 있게 되어 이를 열심히 읽고앞의 원고와 곁들여 편차하고 이름 붙여 「태백일사」라고 했지만 감히 세상에 내지 못하고 비장(秘藏)했다. 때문에 이 글들은 문밖에 나서지 못했던 글들이다”라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가 간행된 중종 7년은 이맥 선생이 「태백일사」를편찬하기 9년 전이다. 그는 조선조정에서 행한 역사테러에 대해 “뜻있는 자의 원한 이렇게 깊은 것을(志士之恨於斯爲深矣)”이라고 한탄했다. 찬수관이 되어 비밀리에 보관되던 여러 서적들을 참조해 「태백일사」를 편찬했으나, 성대한 출판기념회는 고사하고 죄인처럼몰래 숨겨 후손들에게 전했던 책이 450년이 지나서야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멸족된 김부식 가계
분명한 것은 현존하는 「삼국사기」는 김부식의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1145년에 김부식이 「삼국사기」 50권을 지어 바쳤고 「인종실록」을 집필했으며 문집을 20권이나 남겼으나 모두 현재 전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다음과 같은 정치적 사연 때문이다.
1144년 인종 앞에서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태우자 화가 난 정중부가 김돈중을 치고 욕보였다. 이에 김부식이 노해 왕께 정중부에게 매질을 가하라고 주청했다. 이 일로 김부식은 모든 무신들의원한을 사게 되었는데, 1170년 정중부가 난을 일으켜 문신들을 제거할 때 김돈중은 처형된 후 목과 사지가 잘린 상태로 저자거리에 매달렸으며 이미 죽은 아버지 김부식은부관참시를 당했다.
이 사건으로 경주 김씨 김부식 가계가 아예 멸족되었는데 그가 집필했던 작품들이 남았을리가 없다. 설사 「삼국사기」가 출간되었더라도 무신정권 때 모두 불태워졌을 것이고 원고 역시 제대로 보존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약 100년간 무신정권이 이어지다가 몽골에게항복한 고려는 급속하게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이때는 정치가 어수선해 역사책 편찬 같은 문화사업을 하기 힘들 때이므로 고려 때 발간된「삼국사기」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조선 왕조 태조 때 발간된 「삼국사기」는 조정의 통제 아래 있었기에 중종 반정 이후 새 「삼국사기」가 발간되면서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새 「삼국사기」에는 중국의 연호가 표기되어 있고 중국의 왕을 황제 또는 천자라고 기록하면서도, 고구려가 사용했던 연호는 아예 언급이 없고 태왕들이 조선왕조처럼 중국에게 조공을 바치고 칭신했다는 표현이 난무하는 것은 현존 「삼국사기」가 소 중화된 조선 왕조의 각색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삼국사기」는 허구의 천년 기자조선과 위만조선과 한사군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고구려 건국부터 매우 잘못 기술되어 있다. 다음 연재부터는 그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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