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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우크라이나에서는 TV 드라마에서 대통령 역을 맡았던 코미디언 겸 배우가 진짜 대통령에 당선되는 드라마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국민의 종(Servant of the People)’ 정당의 코미디언 출신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41)가 페트로 포로셴코 현 대통령(53)을 압도적 표차로 따돌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무려 39명의 후보가 도전장을 낸 1차투표에서 30.24%로 1위를 차지한 그는 결선에서는 득표율을 두 배 이상 늘리면서 오는 6월 대통령 5년 임기를 시작할 주인공이 됐다.
언론들은 정치 경험이 전무한 정치계의 아웃사이더 젤렌스키가 당선된 것을 두고 우크라이나에 변화를 열망하는 젊은 유권자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변화를 갈구하는 유권자들의 열망은 젤렌스키에게 기대를 걸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젤렌스키의 이미지에 기대와 희망을 건 것이다. 젤렌스키가 기존의 정치인과 달리 참신한 정치인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순전히 그가 맡았던 드라마에서의 배역에서 온 것이다.
젤렌스키는 2015년부터 방영된 드라마 ‘국민의 종’에서 역사교사 역할을 맡아 연기해 왔다. 극중에서 역사교사인 젤렌스키는 수업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정부의 무능을 성토하고, 한 학생이 그 모습을 몰래 촬영해서 인터넷에 올린다. 그렇게 역사교사는 네티즌들 사이에서 인기가 치솟아 유명인이 되고 그 기세로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것이 드라마의 내용이다.
2015년부터 방영된 이 드라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인기를 얻어 5년 동안 계속 새로운 시리즈가 이어져 왔다. 젤렌스키가 창당한 정당 이름 ‘국민의 종’도 이 드라마의 제목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어찌 보면 한편의 코미디 같은 어처구니없는 정치행위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탓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국민들 자신이 그의 이미지가 허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젤렌스키라는 인물로 대변되는 변화였다. 정치권의 무능과 부정부패, 그로 인해 침체된 경제로 고통 받던 국민들은 변화를 갈망했다. 그리고 국민들은 ‘현실의’ 젤렌스키를 통해 변혁을 이루어 내고자 했고 그 열망이 젤렌스키를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하지만 정치 신인 젤렌스키가 73%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단지 변화를 바라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열망 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는 앞서 말한 대로 배우이며 코미디언 출신이다. 한 외신에서는 코미디 배우 출신 대통령을 뽑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선택을 다룬 기사에 ‘우크라이나, 어릿광대를 보내주다(Ukraine Sends in the Clown)’라는 제목을 붙여 보도했다. 젤렌스키가 가진 면모 중에서 코미디언을 부각시켜 어릿광대라는 프레임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상황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어릿광대를 보내주오(Send in the Clowns)’는 본래 뮤지컬에 삽입된 노래로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김연아 선수의 쇼트프로그램 배경음악으로 귀에 익숙한 곡이다. 이 제목에 우크라이나를 앞에 붙여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어릿광대를 정치 무대에 올려놓았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서커스 공연 중 출연자가 실수를 하거나 예기치 않은 사고가 났을 경우 어릿광대를 무대에 등장시킨다. 사태를 수습하는 동안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킬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혼란한 정국에 피로감을 느낀 국민들이 어릿광대를 무대에 불러들였다. 일종의 ‘코믹 릴리프(Comic Relief)’, 즉 심각하고 무거운 상황에서 가벼운 웃음으로 긴장감을 완화하는 장치다. 정치무대에서의 ‘코믹 릴리프’는 젤렌스키의 경우처럼 때로는 반전을 불러온다.
정치란 국가와 국민의 생존과 안위가 달려있는 엄중하고 진지한 삶의 영역이다. 그렇기에 정치적 입장은 좀처럼 양보하기 어렵고 늘 이해관계가 충돌하기 마련이다. 정도와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나라든 여야의 서로 다른 입장에서 정당들이 대립하고 상대를 비판하는 모습은 민주국가에서 당연한 풍경이다.
하지만 국가와 국민 보다는 정당과 나아가 개인의 이해관계에 매몰돼 이전투구의 정쟁 만을 일삼는다면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은 피로가 누적된다. 이때 ‘코믹 릴리프’를 만들어주는 정치인의 등장은 국민의 환호를 받는다.
갤럽 여론 조사에서 밝혀진 미국 국민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역대 대통령은 제 40대와 41대 대통령을 지낸 로널드 레이건이다. 영화배우 출신의 레이건 대통령은 딱딱한 정치 무대에서 종종 유머를 구사해 돌파구를 마련한 정치인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레이건은 1984년 73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대통령 재선에 도전했다. 상대는 그보다 17세 적은 월터 먼데일 후보였다. TV토론에서 먼데일은 고령의 레이건을 궁지에 몰 목적으로 대통령의 나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레이건은 “이번 선거에서 나이를 문제 삼을 생각은 없다”고 대답했다. 뜻밖의 대답에 무슨 의미냐고 묻는 먼데일을 향해 레이건은 “당신이 너무 젊고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뜻이지요”라고 답했다. 청중은 폭소를 터트리고 먼데일도 웃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상대의 비열한 공격을 품위있는 유머로 반격해 역전승을 거둔 레이건의 유머정치다.
레이건 대통령 만큼이나 미국 국민에게 인기 있는 대통령은 링컨이다. 그 역시 정적의 공격에 유머로 멋지게 반격한 에피소드가 있다. 의회에서 한 의원이 링컨에게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라며 질책을 가했다. 그러자 링컨이 되물었다. “내가 만일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 오늘 같이 중요한 자리에 왜 하필 이 얼굴을 갖고 나왔겠습니까?” 의원들이 박장대소하고 공격했던 의원은 머쓱해졌음은 물론이다.
유머는 여유와 지혜에서 나온다. 요즘 패스트트랙으로 우리나라 국회가 연일 시끄럽다. 팽팽히 맞서고 때로는 몸싸움까지 불사하는 여야 의원들도 힘들겠지만 이를 바라보아야 하는 국민들의 피로도도 높아져 가고 있다. 이럴 때 멋지게 상대를 반격하면서 국민들의 피로도 날려주는 품격있는 유머를 구사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일단 국민의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비밀 아닌 비밀을 슬쩍 흘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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