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카리스마는 사회적 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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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카리스마는 사회적 자본

따뜻한 카리스마는 남과 다를 수 있는 용기다

이정일 필진페이지 + 입력 2019-11-24 17:30:02

언어에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다. 카리스마는 권위적인 느낌을 주지만 그 앞에 ‘따뜻한’이란 형용사가 붙자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 세상에선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은 없기에 경쟁을 피할 수 없다.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치열하게 공부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 다음엔 취업이 있고, 또 그 다음엔 승진이 있고, 또 그 다음엔 점점 더 커지는 미지의 상대와 싸워야 한다.

인간사회는 신기하다. 고개 하나만 건너도 언어가 다르고 풍습이 다르다. 그래서 사람을 보는 눈도 다를 것 같은데, 아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데도 사람을 판별하는 기준은 비슷하다. 선한 사람은 누가 보아도 선하고, 까다로운 사람은 누가 보아도 까다롭다. 누구나 살다보면 힘들고 속상한 순간을 겪기 마련이지만 그런 힘든 상황에서도 인간에 대한 진정성과 따뜻한 마음을 간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힘은 어디서 올까.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복제인간

아주 오래 전에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보았다. 너무 오래되어서 스토리가 가물가물하지만 그 마지막 장면만큼은 선명하다. 배경은 미래사회이고 인간과 복제인간이 섞여 함께 살아간다. 하지만 복제인간은 생산 후 4년이면 죽도록 설계되어 있다. 인간 대신 더러운 일을 맡아하던 일련의 복제인간들이 행성을 탈출하여 지구로 잠입한다. 데커드(해리슨 포드 분)는 이들을 제거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마지막 한 명의 복제인간이 남았다. 데커드에게 동료를 잃은 로이가 복수에 나선다. 이들은 비 오는 날 건물 옥상에서 결전을 벌인다. 힘에 밀린 데커드는 난간에 매달리게 된다. 로이는 추락 직전의 데커드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두려움을 안고 사는 기분이 어때? 노예로 산다는 건 그런 기분이야.’ 데커드가 추락하는 순간 로이가 데커드의 손목을 잡아 끌어올린다. 목숨을 살려준 것이다. 당혹스런 데커드에게 로이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너희 인간들이 상상하지 못할 것들을 봤어. 오리온좌의 어깨 위로 포화를 내뿜는 공격함들, C 광선의 빛이 탄호이저의 바다에 깔린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것도 봤지. 그 기억들 모두 시간 속에 사라지겠지, 빗속의 이 눈물처럼. 죽을 시간이다.

이 엔딩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혼란스럽게 떠오른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뭘까, 인간은 어떤 점에서 복제인간 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물음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데커드는 인간이고 복제인간들은 겨우 4년을 살다 죽는 존재인데, 복제인간들이 더 인간처럼 느껴진다. 영화 〈아일랜드〉와 2017년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쓴 소설 《나를 보내지 마》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작품에서는 마담이 클론들의 예술작품을 지속적으로 수집하는 데 결말에 가서 그 이유가 드러난다.

인간들이 클론들을 그저 의학재료를 공급하기 위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마담 한 사람이 다르게 행동한다. 마담은 자신을 찾아온 클론에게 사람들이 스스로를 클론과는 다른 존재라고 자기 암시를 할 때, 즉 클론은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 할 때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클론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소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마담이 보여주는 따뜻한 카리스마는 남과 다를 수 있는 용기다.

사람의 마음은 살얼음 같아

아이가 어릴 때 차 조심을 시키지만 조금만 크면 사람 조심을 시킨다. 낯선 곳을 여행할 때는 사람처럼 무서운 존재도 없다. 때론 피붙이 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던 사람들이 사소한 오해로 남이 되고 멀어진다. 사람은 자존감에 상처를 입는 순간, 마음의 문을 닫는다. 내가 손해라고 느끼는 순간, 관계를 버린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은 수시로 얼어붙는다. 뜨거운 열정이 식어 한 순간에 얼어버릴 수도 있고, 작은 이해관계 때문에 오랜 기간 쌓아온 우정이 살얼음처럼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은 많지만 따뜻한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 드문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인간에 대한 진정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언쟁에서 이기기는 쉬워도 설득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당연한 것을 양보하거나, 상대의 의견을 묻거나, 감사나 사과의 말을 잊지 않는 것 역시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어느 조직에서나 세상을 살맛나게 만들고 인간관계를 이끌어가는 따뜻한 카리스마는 이젠 또 하나의 사회적 자본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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