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단어들’이 우리에게 외치는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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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옥 논설실장 기자페이지 + 입력 2019-12-13 00:02:17

세계 몇몇 사전출판사들은 해마다 ‘올해의 단어’를 선정해 발표하고 있다. 한 해 동안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고 그 해를 상징하는 단어를 선별해 공표한다. 올해도 영국 옥스퍼드 사전과 콜린스 사전, 그리고 미국의 메리엄-웹스터 사전이 각각 선정한 ‘올해의 단어’를 발표했다.

옥스퍼드 사전이 발표한 2019년을 나타내는 단어는 ‘기후 비상(climate emergency)’이다. 옥스퍼드가 이 단어를 선정한 이유는 이 단어의 사용 빈도가 지난 1년간 100배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기후와 관련한 지구 현실의 긴박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됐다. 이는 이전까지 우리에게 익숙해온 ‘기후 변화(climate change)’라는 표현으로는 지구의 현실을 나타내기에 역부족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지구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기후의 변화 양상들이 인류에게 이 변화를 멈추거나 속도를 줄이라고 경고를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방관자의 자리에서 태연히 답습된 생활방식을 이어왔다. 하지만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 이르기 전에 긴급 비상조치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인식이 올해 확산된 것으로 읽혀진다.

아닌 게 아니라 과학자들도 지구에 비상벨을 울렸다. 지난 11월 전 세계 153개국 과학자 1만1258명이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발행하는 과학 전문지 ‘바이오사이언스(BioScience)’를 통해 지구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고자 비상사태를 선언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과학자들은 지구 표면 온도가 상승함에 따라 엄청난 양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다고 경고한다. 이로 인해 해수면이 올라가면서 2050년까지 아시아 주요 도시들이 바닷물에 잠길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들의 말하는 비상사태는 우리에게 임박한 현실이다.

옥스퍼드는 “무명에 가까운 지위”였던 ‘기후 비상’이라는 단어가 2019년 들어 가장 눈에 띄게 떠올랐다고 설명했다. 옥스퍼드에 따르면 ‘기후 비상’이라는 단어는 ‘건강 비상’보다 3배 더 많은 사용빈도를 보였다. 개인의 문제보다 지구의 운명이 더 큰 무게로 다가온 한 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영국 콜린스 사전이 선정한 올해의 단어 역시 기후와 관련된다. 콜린스 사전은 지난 11월 올해 전 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사용된 단어는 ‘기후파업(climate strike)’이라고 선정해 발표했다. 콜린스 측은 “기후파업은 작년부터 세계 거대 도시 곳곳에서 ‘빈번한 현실’이 됐다”고 설명하며, 올해 들어 이 단어의 사용이 전년에 비해 100배나 급증했다고 밝혔다.

기후파업은 스웨덴 출신의 16세 소녀이자 환경 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가 시작한 운동이다. 툰베리는 지난해 9월 매주 금요일마다 학교에 등교하는 대신 스웨덴 의회 앞에서 ‘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 1인 시위를 했다. 이 운동은 전 세계 청소년들의 호응을 얻으며 확산되고 있다. 툰베리는 올해 미국 뉴욕 유엔(UN)본부에서 열린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도 세계 정상들 앞에서 4분 30여 초 동안 연설하며 “환경문제로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어가고 있다. 생태계 전체가 무너지고 있는데 어른들은 돈과 경제성장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며 거침없는 비판을 가했다. 툰베리는 타임지가 선정하는 2019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다.

한편, 미국 메리엄-웹스터 사전은 지난 10일(현지시간) 2019년을 나타내는 단어는 ‘데이(they)’라고 발표했다. 일반적으로 한 해를 대표하는 단어로는 ‘정의(justice)’, ‘셀피(Selfie)’ 같은 명사나 ‘점거하다(occupy)’와 같은 동사, 혹은 ‘유독한(toxic)’과 같은 형용사가 선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올해 메리엄-웹스터는 너무나 익숙하고 흔한 단어인 대명사 ‘they’를 선정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놀란 것은 출판사 편집팀도 마찬가지였다. 메리엄-웹스터 측은 ‘올해의 단어’를 선정하는 방식에 대해 통계상 한 해 동안 사전에서 가장 많이 검색되고 그 검색량이 급증한 단어를 찾는다고 밝혔다. 그 결과 ‘they’가 1위에 오른 것을 확인하고 출판사 편집팀도 깜짝 놀랐다. 이토록 평범한 단어가 검색어 1위에 오른 것은 분명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올해 어떤 변화가 있음을 말해준다. 메리엄-웹스터 사전은 ‘they’라는 단어에 생긴 변화를 확인해 “성 정체성이 이분법(여성·남성)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나 성별을 밝히고 싶지 않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는 새로운 설명을 추가했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1889년~1976년)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의 인식체계는 언어로 구성되며 언어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 언어의 한계는 곧 사고와 존재의 한계라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인간은 언어의 발전을 통해 사고의 영역이 확장되고 존재가 풍요로워진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볼 때 올해는 소위 LGBTQ라고 불리는 성소수자에게 존재의 집을 마련해 준 해라고 말할 수 있다. 영어에서 그(he)도 아니고 그녀(she)도 아닌 그들을 위해 성 정체성에 구애받지 않는 복수 대명사 ‘they’를 차용해 3인칭 복수 뿐 아니라 단수를 의미하도록 그 의미를 확장해 성소수자가 존재할 수 있는 언어의 영역을 마련해 준 것이다.

한 해를 나타내는 단어는 우리나라에서도 전국 교수들의 의견을 모아 ‘교수신문’에서 발표한다. 지난해에는 ‘논어(論語)’ 태백편(泰伯篇)에 실린 고사성어로,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뜻을 지닌 ‘任重道遠’(임중도원)이 선정됐다. 올해 국가나 지구적 차원에서 민초들이 지고 온 짐이 너무나 무거웠다. 앞으로 갈 길은 순탄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박선옥 논설실장 sobahk@skyedaily.com 기자페이지 +